악연 -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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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리우레탄 주머니를 미드솔에 집어넣은 탓에 스펀지 위를 걷듯이 플리플랍 슬리퍼를 푹신푹신 끌면서 그녀는 교무실에 들어섰다.
구석에 있는 자기자리로 가는 동안 특별활동부 보직교사인 이선생이 손을 흔들었다.
"김선생님, 수업 끝났어?"
"네."
그녀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거의 다 해가? 내일까지 되겠어요?"
"아우..힘들어요. 교재도 만들어야 되구.."
그녀가 입고있던 차이나 칼라장식의 하얀 린넨 재킷 끝 부분을 잡아당기며 인상을 썼다.
이선생이 멋적게 머리를 긁었다.
"내일 교감선생님 드려야 되는데..빨리 해야 된다고 그랬잖아."
어차피 해야 할 것이다. 그녀는 어깨를 늘어뜨리는 시늉을 하며 자기자리로 걸어갔다.
"알았어요. 그것부터 해야지,뭐."
이선생은 힘내라는 듯 주먹을 불끈 쥐어보이더니 다시 책상으로 얼굴을 숙였다.
기지개를 켜며 등받이에 허리를 대는 수학 선생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수업을 마치고 각종 서류철이 잔뜩 쌓인 자신의 책상 앞에 앉으면 그녀는항상 그 날 일과의 2라운드가 시작된다는 느낌을 받았다. 오로지 사무기능만을 생각해서 고안된 기능적이고도 값싼 그녀의 책상은 이제는 오래되서 모서리 부분의 은색 몰딩이 닳아 회색빛으로 변했지만 잡다한 교원 잡무를 처리하기엔 전혀 모자람이 없었다.
연체리색 파티클 보드를 얹은 상판아래로 다리를 밀어넣던 그녀는 입고있던 맥시스커트가 딱딱한 철제 프레임 사이에 끼는 바람에 의자를 뒤로 물렀다가 다시 당겨야했다.
맬런지-아이보리색의 일자형 스커트는 꽉 조이는 느낌이 있었으나 신축성이 좋아 움직이는데 불편하지 않았으며 발목 근처에서 무릎까지 굽이치도록 재단된 스커트 끝단이 입는 사람을 훨씬 어리게 보이게끔 해주었다.
그녀의 친구가 이 옷을 입었을 때 하체가 더욱 날씬해 보인다며 부러워 하는 바람에 일주일에 한번 정도는 꼭 입어주는 옷이었다.
그녀는 지난 시간에 따라놓았다가 미처 마시지 못한 녹차가 담긴 컵을 들고선 컴퓨터를 켜서 이선생이 채근하던 특기교육 활동에 대한 계획서 파일을 열었다.
신명조체 20포인트 크기로 뽑아놓은 제목엔 잉글리쉬 빌리지 개설이라고 적혀 있었다.
제목 밑엔 개인의 창의성을 증진시킨다는 식의 얘기를 늘어놓은 교육의 목적이 적혀 있었고 그 밑엔 구체적인 실천 방향이 여러 단락으로 끊어지며 간단명료하게 씌어져 있었다.
방학 중에 딱딱한 보충수업만 진행하거나 자율학습으로 시간만 죽이느니 요즘 트렌드를 반영해서 영어마을을 만들어 희망학생을 마을주민으로 입주시킨다는 것이 내용인데 가짜긴 하지만 학생들에게 각각 직업도 주고 그에 맞는 상황도 설정하고 평소 친하게 지내던 원어민 교사도 잠깐 초빙해오면 순발력있는 생활영어 교실이 만들어질 것이라는 전망을 덧붙이고 있었다.
항상 그렇듯 문제는 예산과 인원이었다. 학교에 부담되지 않는 예산, 무난해 보이도록 동원되어야 하는 인원, 거기에 거절당하지 않을만큼 적당해보이는 관습적인 아이디어.
처리할 업무는많고 시간은 없기 때문에 교무행정의 전반은 언제나 관습적으로 흘러가기 마련이다.
그녀는 이미 씌여있는 내용들을 빠르게 스킵하면서 영어마을에서 학생들이 구체적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를 적어놓은 난을 찾아 타이핑을 시작했다.
그는 단단히 테이프를 붙인 박스를 하나 어깨에 메고 정비서를 따라 나섰다.
"아휴..덥네. 김과장은 휴가 안가요?"
정비서가 손부채를 부치며 뒤따라오는 그에게 말을 던졌다.
"에이, 휴가는요. 저희는 이제부터 현장나가야 되는데요. 어데..정비서님께선 다녀오셨습니까."
그가 실실 웃으며 붙임성있게 대답했다.
"아이고. 영감탱이가 뭘 챙겨줘야 가지. 전혀 생각도 안해주고 있어요. 지는 맨날 놀러다니면서. 응? 난 항상 대기하래. 나 참."
정비서는 코에 맺힌 땀을 닦는지 잠시 코를 긁더니 맹렬히 이사장 욕을 하기 시작했다.
그는 정비서의 욕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맞장구를 쳐주었다.
"윗사람들은 다 그런가봐요. 우리 사장님도 되게 짜거든요."
약간 얼띠어 보일만큼 순진한 말투와는 대조적으로 그는 낮게 내리깐 시선으로 주변을 흘깃흘깃 둘러보았다.
자신들을 특별히 지켜보는 눈은 없었다.
인적이 드문 오후의 골목길은 시끄럽던 도시 소음마저 잦아들어 평상 위에 뒹굴던 김빠진 사이다처럼 후텁지근하고 맥없는 공기로 혼탁하게 채워져 있었다.
"그나저나 김과장은 우리 은행이랑 거래하는거 첨이죠? 어떻게..소개받았나?"
정비서는 평소 업무시간에 입고 있던 정장 수트 대신 투톤 칼라감이 감도는 연한 베이지색 캐주얼 재킷을 걸치고 있었는데 많이 구겨지고 셔츠나 바지, 구두 따위와 어울리지도 않는 것으로 보아 차려입었다기 보다는 그저 친구와 만나는 것 같은 분위기를 내기위해 대충 얻어 걸친 모습이었다.
은행 좋아하네, 금고 주제에. 그는 무겁게 어깨를 눌러오는 박스를 손으로 꾹 누르며 속으로 이죽댔다.
"아,예. 그..오 사장님 계시잖습니까. 하성빌딩 건물주요. 아파트 지으시는.."
"응,응. 오 사장. 잘 알지. 그 양반이?"
"예, 오 사장님도 많이 이용하셨다고."
그는 기분나쁜 웃음을 지으며 상대가 아픈 쪽을 건드렸다.
아니나다를까. 정비서는 펄쩍 손을 내저으며 정색을 했다.
"아니, 무슨 소릴. 오 사장님과 우린 그런 사이 아니야. 그냥 이사장님과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걸로만 알고 있어요. 안 그래도 그 양반 횡령으로 조사받고 나왔다고 하던데..큰 일납니다. 그런 소리하면."
그는 터지려는 웃음을 참았다.
순진한거나 멍청하거나 둘 중 하나다.
아직 저희들이 어떤 길로 들어섰는지 잘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이사장은 사법기관에 연줄을 좀 놓은 모양이던데 말하는 품새로 보아 이 녀석은 그야말로 심부름 정도만 할 뿐 자세한 내용은 알지 못하는게 분명했다.
"김과장은 나이가 젊어보이는데..몇이요?"
여전히 반 보가량 앞서가며 정비서가 물었다.
녹슨 함석판처럼 구질구질한 광택이 흐르는아우터 위로 이제 희끗희끗해진 정비서의 뒷머리 끝이 보였다.
"아직 어립니다. 서른이요."
"아..한창 때구만. 생각보다 젊네. 일솜씨가 보통이 아닌가봐. 그 나이에 벌써.."
정비서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발걸음을 재게 놀렸다.
그가 한순간 미간을 찌푸리며 눈썹을 세웠다.
그는 나이를 물어보는 것을 싫어했다.
사업상 만나는 사람들이 나이를 물어보는 일이 적지않아 어쩔 수 없이 서른이라고 하기로 작정하고 있었지만 그의 실제 나이는 스물 둘 밖에는 되지 않았다.
그는 그의 적은 나이 때문에 입게 될 지도 모를 손해를 증오했다.
그의 생각에 그들이 나이를 물어보는 이유는 뻔했다.
그것을 통해 어떤 우위를 점하고 싶은 것이다.
그가 어리다는 것을 안 순간 말을 놓거나 거리낌없이 하대를 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이렇게 얕잡혀 보임으로써 쉽게 성사될 수 있는 일조차 어렵게 진행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것은 그를 거의 미치게 만들었다.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데, 니 새끼들이 사십, 오십을 처먹도록 살았어도 꿈에서 조차 상상하지 못할 일들을 겪어왔어, 니들이 숨이 붙어 있는 인간의 목을 딸 때 그 사시미 날 위에서 멱통 갈라지는 느낌을 알기나 해.
그는 정비서의 머리를 붙들고 붉으죽죽한 귓 바퀴 안에 대고 고함을 지르고 싶었다.
그가 그 나이에 이례적일 정도로 빠르게 중간보스까지 맡게 된 것은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우선 경쟁을 즐겨 시키는 보스의 원칙이 큰 몫을 했다.
"간악한 거지, 간악한 거야."
예전 그가 있던 팀에서 그를 부리던 팀장이 함께 차를 타고 가며 한 말이었다.
"팀이 너무 많아,씨발. 좆나게 많이 만들어서 서로 싸움을 시킨다니까."
팀장은 그를 노려보며 내뱉듯이 말했다.
그는 팀장의 시선을 조용히 감내하고 있었지만 그 의미는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건 회사에서 너도 팀하나 만들어 준다고 했냐? 라는 뜻이었다.
보스는 성과를 내는 조직원이 생기면 무조건 그 조직원에게 팀을 만들어 맡겼다.
그 말은 곧 원래 그 업무를 담당하던 팀과는 원수가 된다는 뜻이다.
두 팀은 마치 전쟁을 치루듯 경쟁을 하게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느 한 쪽으로 정리되었다.
이러한 시스템은 자신의 지배를 견고하게 하는데도 사용되었는데 간부급 조직원들 중에 견제를 하고 싶은 사람이 있을 경우 보스는 그 밑에서 일하는 팀원들 중 몇을 빼내 또다른 팀을 꾸려 경쟁을 시키며 가지를 치듯 견제하고자 하는 간부의 세력을 쳐 나갔다.
경쟁과 함께 또하나 보스가 가진 원칙은 무자비한 상벌제였다.
경쟁에서 이기거나 뛰어난 성과를 얻어낸 조직원은 돈과 직위를 보장해주었지만 회사에 해를 입히거나 쳐내야 할 자로 낙인찍히는 경우엔 참혹한 린치를 가했다.
린치에 참여하는 자들은 대부분 같은 팀의 팀원들이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는 안하무인격의 이러한 보스의 원칙과 확실한 상벌제 때문에 모두들 뒤에서는 칼을 갈았지만 보스 앞에선 너나 할 것없이 충성 경쟁을 펼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의 빠른 승진엔 그 이유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냉혹한 일처리와 잔인한 힘의 행사.
그것이 그를 규정하는 특징이었고 보스의 눈에 든 이유였다.
그는 열 일곱에 회사에 들어와 내 피, 네 피 가리지 않고 수천 바께스를 뒤집어 썼다고 자부할 만큼 거칠고 신속하게 일을 처리하는데 정평이 나 있었다.
회사가 작업이 들어갈 부동산에 인수 정지업무를 하던 팀에 있었을 때 그는 부동산 소유주나 인수 경쟁자를 주저앉히기 위해서 폭행, 강간, 협박 등 그 어떤 짓도 서슴지 않았다.
그가 한껀씩 해낼 때마다 회사에서조차 지독하다고 혀를 내두르거나 잘 나가기 위해 안달이 난 놈이라고 말들이 많았지만 사실 이것은 그저 튀기위해, 또는 경쟁에서 이기기위해 했던 전략적인 행동이 아니었다.
이것은 본성 때문이었다.
천성이 그런 것이다.
지나치게 잔인한 그의 면면이 부모없이 고아원에서 자라 온 척박한 환경 때문에 후천적으로 길러진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만약 천성이라는 것이 있다면 이 잔인함은 그의 천성이었다.
그는 나이를 묻는 정비서를 향해 맨틀 층의 마그마가 들끓듯 욕지기가 치밀어 올랐으나 일을 망치지 않기 위해서 억눌러 참았다
하긴 나이를 물어보는 것이 싫다고 해서 누가 물을 때마다 턱주가리를 날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굳이 서른이라고 대답하는 까닭은 너무 많이 부르면 자기가 풍기는 분위기에 맞지 않아 의심을 사기 쉽고 또 너무 적게 부르면 이미 정비서가 말했듯이 승진이 빠르네,어쩌네 하면서 낮춰 보는 경우가 생기기 때문이었다.
차들이 줄지어 주차되어 있는 담장들을 몇번 꺾어져 들어가더니 정비서는 수수해 보이는 중형차 쪽으로 다가가 뒷트렁크를 열어주었다.
그는 트렁크 속에 박스를 넣고는 특별히 포장된 꾸러미 하나를 정비서에게 건넸다.
"이건 저희 사장님께서 이사장님께 드리는 선물입니다. 잘 봐주셔서 고맙다는 말씀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응? 그래요?..이게 뭐지?"
정비서는 꾸러미를 손에 들고 무게를 재는 시늉을 하며 주제넘는 호기심을 보였다.
그에게는 정비서의 호기심을 만족시켜 줄 이유가 없었다.
"글쎄요. 저희야 뭐, 전달하라는 것만 지시받았으니까요."
"아..그래요. 하여튼 뭐, 이제 대출은 걱정말고..인수만 남았으니 열심히 뛰세요."
"그래야죠."
그는 정비서에게 다구리를 먹이듯이 인사를 했다.
정비서는 빈 맥주캔 구겨지는 것처럼 몸을 접어 운전석 안으로 들어가더니 곧 시동을 걸고 그곳을 떠났다.
"저 차는 또 어디서 구했대?"
혼잣말을 하며 담배를 꺼내는 그의 얼굴엔 정비서를 대할 때 보여주었던 사람좋던 미소는 간데없고 깊게 패인 주름살과 삶은 고기 찔러보는 쇠꼬챙이처럼 뾰죽한 눈초리가 자리잡고 있었다.
그는 핸드폰을 꺼내 단축버튼을 길게 눌렀다.
"예, 사장님. 광길입니다. 지금 마지막 상자 건네줬습니다. 예, 예, 아무 일 없었고..제가 직접 실어줬습니다. 예. 녹음은 다 해 놓았습니다. 예, 예..알겠습니다. 그럼."
그는 전화를 끊고 내려왔던 길을 다시 올라가기 시작했다.
양산을 쓴 아주머니 한명이 카프백 하나를 어깨에 매고 잰 걸음으로 지나갔다.
송아지 가죽이 하얗게 눈을 찔렀다.
그때 다시 그의 전화가 울렸다.
"여보세요. 응, 그래. 말해. 알아냈어? 아직 선생이야?..응, 어느 학교? 여학교로? 아..방학. 벌써 방학인가. 씨벌. 선생 좋네."
그는 거리에 침을 뱉었다.
"좋아. 그렇게 해. 계획 잘 세우고..끊는다."
그는 반쯤 태운 담배를 볼이 오묵해지도록 힘껏 빨고는 길가에 주차된 승용차 본넷 위로 집어던졌다.
구석에 있는 자기자리로 가는 동안 특별활동부 보직교사인 이선생이 손을 흔들었다.
"김선생님, 수업 끝났어?"
"네."
그녀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거의 다 해가? 내일까지 되겠어요?"
"아우..힘들어요. 교재도 만들어야 되구.."
그녀가 입고있던 차이나 칼라장식의 하얀 린넨 재킷 끝 부분을 잡아당기며 인상을 썼다.
이선생이 멋적게 머리를 긁었다.
"내일 교감선생님 드려야 되는데..빨리 해야 된다고 그랬잖아."
어차피 해야 할 것이다. 그녀는 어깨를 늘어뜨리는 시늉을 하며 자기자리로 걸어갔다.
"알았어요. 그것부터 해야지,뭐."
이선생은 힘내라는 듯 주먹을 불끈 쥐어보이더니 다시 책상으로 얼굴을 숙였다.
기지개를 켜며 등받이에 허리를 대는 수학 선생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수업을 마치고 각종 서류철이 잔뜩 쌓인 자신의 책상 앞에 앉으면 그녀는항상 그 날 일과의 2라운드가 시작된다는 느낌을 받았다. 오로지 사무기능만을 생각해서 고안된 기능적이고도 값싼 그녀의 책상은 이제는 오래되서 모서리 부분의 은색 몰딩이 닳아 회색빛으로 변했지만 잡다한 교원 잡무를 처리하기엔 전혀 모자람이 없었다.
연체리색 파티클 보드를 얹은 상판아래로 다리를 밀어넣던 그녀는 입고있던 맥시스커트가 딱딱한 철제 프레임 사이에 끼는 바람에 의자를 뒤로 물렀다가 다시 당겨야했다.
맬런지-아이보리색의 일자형 스커트는 꽉 조이는 느낌이 있었으나 신축성이 좋아 움직이는데 불편하지 않았으며 발목 근처에서 무릎까지 굽이치도록 재단된 스커트 끝단이 입는 사람을 훨씬 어리게 보이게끔 해주었다.
그녀의 친구가 이 옷을 입었을 때 하체가 더욱 날씬해 보인다며 부러워 하는 바람에 일주일에 한번 정도는 꼭 입어주는 옷이었다.
그녀는 지난 시간에 따라놓았다가 미처 마시지 못한 녹차가 담긴 컵을 들고선 컴퓨터를 켜서 이선생이 채근하던 특기교육 활동에 대한 계획서 파일을 열었다.
신명조체 20포인트 크기로 뽑아놓은 제목엔 잉글리쉬 빌리지 개설이라고 적혀 있었다.
제목 밑엔 개인의 창의성을 증진시킨다는 식의 얘기를 늘어놓은 교육의 목적이 적혀 있었고 그 밑엔 구체적인 실천 방향이 여러 단락으로 끊어지며 간단명료하게 씌어져 있었다.
방학 중에 딱딱한 보충수업만 진행하거나 자율학습으로 시간만 죽이느니 요즘 트렌드를 반영해서 영어마을을 만들어 희망학생을 마을주민으로 입주시킨다는 것이 내용인데 가짜긴 하지만 학생들에게 각각 직업도 주고 그에 맞는 상황도 설정하고 평소 친하게 지내던 원어민 교사도 잠깐 초빙해오면 순발력있는 생활영어 교실이 만들어질 것이라는 전망을 덧붙이고 있었다.
항상 그렇듯 문제는 예산과 인원이었다. 학교에 부담되지 않는 예산, 무난해 보이도록 동원되어야 하는 인원, 거기에 거절당하지 않을만큼 적당해보이는 관습적인 아이디어.
처리할 업무는많고 시간은 없기 때문에 교무행정의 전반은 언제나 관습적으로 흘러가기 마련이다.
그녀는 이미 씌여있는 내용들을 빠르게 스킵하면서 영어마을에서 학생들이 구체적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를 적어놓은 난을 찾아 타이핑을 시작했다.
그는 단단히 테이프를 붙인 박스를 하나 어깨에 메고 정비서를 따라 나섰다.
"아휴..덥네. 김과장은 휴가 안가요?"
정비서가 손부채를 부치며 뒤따라오는 그에게 말을 던졌다.
"에이, 휴가는요. 저희는 이제부터 현장나가야 되는데요. 어데..정비서님께선 다녀오셨습니까."
그가 실실 웃으며 붙임성있게 대답했다.
"아이고. 영감탱이가 뭘 챙겨줘야 가지. 전혀 생각도 안해주고 있어요. 지는 맨날 놀러다니면서. 응? 난 항상 대기하래. 나 참."
정비서는 코에 맺힌 땀을 닦는지 잠시 코를 긁더니 맹렬히 이사장 욕을 하기 시작했다.
그는 정비서의 욕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맞장구를 쳐주었다.
"윗사람들은 다 그런가봐요. 우리 사장님도 되게 짜거든요."
약간 얼띠어 보일만큼 순진한 말투와는 대조적으로 그는 낮게 내리깐 시선으로 주변을 흘깃흘깃 둘러보았다.
자신들을 특별히 지켜보는 눈은 없었다.
인적이 드문 오후의 골목길은 시끄럽던 도시 소음마저 잦아들어 평상 위에 뒹굴던 김빠진 사이다처럼 후텁지근하고 맥없는 공기로 혼탁하게 채워져 있었다.
"그나저나 김과장은 우리 은행이랑 거래하는거 첨이죠? 어떻게..소개받았나?"
정비서는 평소 업무시간에 입고 있던 정장 수트 대신 투톤 칼라감이 감도는 연한 베이지색 캐주얼 재킷을 걸치고 있었는데 많이 구겨지고 셔츠나 바지, 구두 따위와 어울리지도 않는 것으로 보아 차려입었다기 보다는 그저 친구와 만나는 것 같은 분위기를 내기위해 대충 얻어 걸친 모습이었다.
은행 좋아하네, 금고 주제에. 그는 무겁게 어깨를 눌러오는 박스를 손으로 꾹 누르며 속으로 이죽댔다.
"아,예. 그..오 사장님 계시잖습니까. 하성빌딩 건물주요. 아파트 지으시는.."
"응,응. 오 사장. 잘 알지. 그 양반이?"
"예, 오 사장님도 많이 이용하셨다고."
그는 기분나쁜 웃음을 지으며 상대가 아픈 쪽을 건드렸다.
아니나다를까. 정비서는 펄쩍 손을 내저으며 정색을 했다.
"아니, 무슨 소릴. 오 사장님과 우린 그런 사이 아니야. 그냥 이사장님과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걸로만 알고 있어요. 안 그래도 그 양반 횡령으로 조사받고 나왔다고 하던데..큰 일납니다. 그런 소리하면."
그는 터지려는 웃음을 참았다.
순진한거나 멍청하거나 둘 중 하나다.
아직 저희들이 어떤 길로 들어섰는지 잘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이사장은 사법기관에 연줄을 좀 놓은 모양이던데 말하는 품새로 보아 이 녀석은 그야말로 심부름 정도만 할 뿐 자세한 내용은 알지 못하는게 분명했다.
"김과장은 나이가 젊어보이는데..몇이요?"
여전히 반 보가량 앞서가며 정비서가 물었다.
녹슨 함석판처럼 구질구질한 광택이 흐르는아우터 위로 이제 희끗희끗해진 정비서의 뒷머리 끝이 보였다.
"아직 어립니다. 서른이요."
"아..한창 때구만. 생각보다 젊네. 일솜씨가 보통이 아닌가봐. 그 나이에 벌써.."
정비서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발걸음을 재게 놀렸다.
그가 한순간 미간을 찌푸리며 눈썹을 세웠다.
그는 나이를 물어보는 것을 싫어했다.
사업상 만나는 사람들이 나이를 물어보는 일이 적지않아 어쩔 수 없이 서른이라고 하기로 작정하고 있었지만 그의 실제 나이는 스물 둘 밖에는 되지 않았다.
그는 그의 적은 나이 때문에 입게 될 지도 모를 손해를 증오했다.
그의 생각에 그들이 나이를 물어보는 이유는 뻔했다.
그것을 통해 어떤 우위를 점하고 싶은 것이다.
그가 어리다는 것을 안 순간 말을 놓거나 거리낌없이 하대를 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이렇게 얕잡혀 보임으로써 쉽게 성사될 수 있는 일조차 어렵게 진행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것은 그를 거의 미치게 만들었다.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데, 니 새끼들이 사십, 오십을 처먹도록 살았어도 꿈에서 조차 상상하지 못할 일들을 겪어왔어, 니들이 숨이 붙어 있는 인간의 목을 딸 때 그 사시미 날 위에서 멱통 갈라지는 느낌을 알기나 해.
그는 정비서의 머리를 붙들고 붉으죽죽한 귓 바퀴 안에 대고 고함을 지르고 싶었다.
그가 그 나이에 이례적일 정도로 빠르게 중간보스까지 맡게 된 것은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우선 경쟁을 즐겨 시키는 보스의 원칙이 큰 몫을 했다.
"간악한 거지, 간악한 거야."
예전 그가 있던 팀에서 그를 부리던 팀장이 함께 차를 타고 가며 한 말이었다.
"팀이 너무 많아,씨발. 좆나게 많이 만들어서 서로 싸움을 시킨다니까."
팀장은 그를 노려보며 내뱉듯이 말했다.
그는 팀장의 시선을 조용히 감내하고 있었지만 그 의미는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건 회사에서 너도 팀하나 만들어 준다고 했냐? 라는 뜻이었다.
보스는 성과를 내는 조직원이 생기면 무조건 그 조직원에게 팀을 만들어 맡겼다.
그 말은 곧 원래 그 업무를 담당하던 팀과는 원수가 된다는 뜻이다.
두 팀은 마치 전쟁을 치루듯 경쟁을 하게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느 한 쪽으로 정리되었다.
이러한 시스템은 자신의 지배를 견고하게 하는데도 사용되었는데 간부급 조직원들 중에 견제를 하고 싶은 사람이 있을 경우 보스는 그 밑에서 일하는 팀원들 중 몇을 빼내 또다른 팀을 꾸려 경쟁을 시키며 가지를 치듯 견제하고자 하는 간부의 세력을 쳐 나갔다.
경쟁과 함께 또하나 보스가 가진 원칙은 무자비한 상벌제였다.
경쟁에서 이기거나 뛰어난 성과를 얻어낸 조직원은 돈과 직위를 보장해주었지만 회사에 해를 입히거나 쳐내야 할 자로 낙인찍히는 경우엔 참혹한 린치를 가했다.
린치에 참여하는 자들은 대부분 같은 팀의 팀원들이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는 안하무인격의 이러한 보스의 원칙과 확실한 상벌제 때문에 모두들 뒤에서는 칼을 갈았지만 보스 앞에선 너나 할 것없이 충성 경쟁을 펼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의 빠른 승진엔 그 이유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냉혹한 일처리와 잔인한 힘의 행사.
그것이 그를 규정하는 특징이었고 보스의 눈에 든 이유였다.
그는 열 일곱에 회사에 들어와 내 피, 네 피 가리지 않고 수천 바께스를 뒤집어 썼다고 자부할 만큼 거칠고 신속하게 일을 처리하는데 정평이 나 있었다.
회사가 작업이 들어갈 부동산에 인수 정지업무를 하던 팀에 있었을 때 그는 부동산 소유주나 인수 경쟁자를 주저앉히기 위해서 폭행, 강간, 협박 등 그 어떤 짓도 서슴지 않았다.
그가 한껀씩 해낼 때마다 회사에서조차 지독하다고 혀를 내두르거나 잘 나가기 위해 안달이 난 놈이라고 말들이 많았지만 사실 이것은 그저 튀기위해, 또는 경쟁에서 이기기위해 했던 전략적인 행동이 아니었다.
이것은 본성 때문이었다.
천성이 그런 것이다.
지나치게 잔인한 그의 면면이 부모없이 고아원에서 자라 온 척박한 환경 때문에 후천적으로 길러진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만약 천성이라는 것이 있다면 이 잔인함은 그의 천성이었다.
그는 나이를 묻는 정비서를 향해 맨틀 층의 마그마가 들끓듯 욕지기가 치밀어 올랐으나 일을 망치지 않기 위해서 억눌러 참았다
하긴 나이를 물어보는 것이 싫다고 해서 누가 물을 때마다 턱주가리를 날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굳이 서른이라고 대답하는 까닭은 너무 많이 부르면 자기가 풍기는 분위기에 맞지 않아 의심을 사기 쉽고 또 너무 적게 부르면 이미 정비서가 말했듯이 승진이 빠르네,어쩌네 하면서 낮춰 보는 경우가 생기기 때문이었다.
차들이 줄지어 주차되어 있는 담장들을 몇번 꺾어져 들어가더니 정비서는 수수해 보이는 중형차 쪽으로 다가가 뒷트렁크를 열어주었다.
그는 트렁크 속에 박스를 넣고는 특별히 포장된 꾸러미 하나를 정비서에게 건넸다.
"이건 저희 사장님께서 이사장님께 드리는 선물입니다. 잘 봐주셔서 고맙다는 말씀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응? 그래요?..이게 뭐지?"
정비서는 꾸러미를 손에 들고 무게를 재는 시늉을 하며 주제넘는 호기심을 보였다.
그에게는 정비서의 호기심을 만족시켜 줄 이유가 없었다.
"글쎄요. 저희야 뭐, 전달하라는 것만 지시받았으니까요."
"아..그래요. 하여튼 뭐, 이제 대출은 걱정말고..인수만 남았으니 열심히 뛰세요."
"그래야죠."
그는 정비서에게 다구리를 먹이듯이 인사를 했다.
정비서는 빈 맥주캔 구겨지는 것처럼 몸을 접어 운전석 안으로 들어가더니 곧 시동을 걸고 그곳을 떠났다.
"저 차는 또 어디서 구했대?"
혼잣말을 하며 담배를 꺼내는 그의 얼굴엔 정비서를 대할 때 보여주었던 사람좋던 미소는 간데없고 깊게 패인 주름살과 삶은 고기 찔러보는 쇠꼬챙이처럼 뾰죽한 눈초리가 자리잡고 있었다.
그는 핸드폰을 꺼내 단축버튼을 길게 눌렀다.
"예, 사장님. 광길입니다. 지금 마지막 상자 건네줬습니다. 예, 예, 아무 일 없었고..제가 직접 실어줬습니다. 예. 녹음은 다 해 놓았습니다. 예, 예..알겠습니다. 그럼."
그는 전화를 끊고 내려왔던 길을 다시 올라가기 시작했다.
양산을 쓴 아주머니 한명이 카프백 하나를 어깨에 매고 잰 걸음으로 지나갔다.
송아지 가죽이 하얗게 눈을 찔렀다.
그때 다시 그의 전화가 울렸다.
"여보세요. 응, 그래. 말해. 알아냈어? 아직 선생이야?..응, 어느 학교? 여학교로? 아..방학. 벌써 방학인가. 씨벌. 선생 좋네."
그는 거리에 침을 뱉었다.
"좋아. 그렇게 해. 계획 잘 세우고..끊는다."
그는 반쯤 태운 담배를 볼이 오묵해지도록 힘껏 빨고는 길가에 주차된 승용차 본넷 위로 집어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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