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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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버지는 버마 아웅산 사건이 터지기 일주일 전인 그해 국군의 날에

세상을 등졌다.

세상에 아무도 없는 그야말로 사고무친이셨던 우리 아버지.

나중에야 아버지에게 어머님이 다른 형님이 계시고 아버지가 다른 동생이 있다는 것을 알았지요.

우리가 클때에는 아버지는 언제나 혼자이셨읍니다.

우리는 외가집에 다녔기에 친가쪽에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어요.

우리 엄마와 아버지는 모두 재가를 한 분이라

가족의 구성원이 너무나 복잡합니다.

당신의 아이와 내 아이가 우리 아이를 못살게 굴어요라는 말이 우리 가정이었어요.

엄마는 요번에 간경화말기라고 진단을 받은 큰 오빠를 데리고 아버지에게 오셨고 내가 국민학교 이학년때에 아버지는 자신의 핏줄을 데리고 왔지요.

나중에 안일이지만 그 당시에 큰엄마라고 해야 하나...

아버지의 본처가 죽었어요. 한이 많이 가지고요.

그래서 우리 가족은 엄청나게 늘었지요.

아버지가 데리고 온 핏줄은 남자1명 여자3명인데 나보다 위라야 맞는데

하나는 나보다도 어렸어요.

그렇게 한집에 살기 시작을 했죠...

그 삶이란 날마다 영화 같은 삶이었어요.

아버지는 일자무식이었어요.

그런 아버지가 한의학에는 조회가 깊었어요.

그래서 침도 놓고 약도 지어 주고 하면서 우리의 삶을 영위를 했지요.

큰오빠는 대학을 나오고 나 역시 대학을 나오고 내 위에 언니도 대학을 나왔지만 정작 아버지의 큰아들인 나의 작은 오빠는 강패가 되고 말았어요.

아버지는 그 오빠에게 경희대 한방과를 가라고 했지만 이미 강패의 길로 들어선 오빠에게는 소용이 없는 일이었지요.

작은 오빠는 몇차례를 교도소에 갔다왔어요.

폭력으로요. 인천에서 알만한 사람은 전부 아는 강패였어요.

아버지는 늘 가슴속에 한을 품고 살수밖에 없었어요.

자신의 핏줄은 어느 누구도 대학을 가지 못했는데

내 엄마에게서 낳은 자식들은 전부 대학을 나왔으니 말입니다.

아버지는 그렇게 자신이 못배운 한을 우리에게 풀려고 학교는 다닐수가 있을때까지 밀어 주셨아요.

내가 대학 발표를 보러 가기 전날에 엄마와 아빠는 부부싸움을 했어요.

곧 이혼을 할것 같았어요.

지금이야 인터넷으로 전부 확인을 할수가 있지만.....

그때는 학교에 가야만이 알수가 있었어요.

공주 차부에 내려서 신관리까지 걸어서 가면서 마주 오는 학생들의 표정을 살폈어요. 합격을 한 사람은 얼굴이 밝았고 떨어진 사람은 머리를 땅으로 향하고 걸어 왔어요.

나는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이었는데 발표장에 가니 내 이름이 있었어요.

너무나 기뻤어요. 나는 올라와서는 집에는 안들어가고 친구들과 놀다가 아주 늦게 집으로 갔어요.

문을 열어주는 엄마에게 나는 물어 보지도 않는 말을 했지요.

" 엄마 , 나, 떨어졌어요 " 하고 말하니 엄마는 잘떨어졌다고 하는 것이 아니겠어요, 놀래서 다시 떨어졌다고 하니 이번에도 잘 떨어졌어 하는 것이예요.

나는 더 이상 할말을 잃어 버렸어요.

그때에 아빠가 나오시면서 하는 말이 " 아침에 내가 학교에 전화를 해서 알아보았다" 라고 하시는 것예요.

결국 나의 합격이 엄마와 아빠의 싸움을 중재를 해준격이 되었어요...

낙방에 있는 아버지에 대한 글을 읽다가 아빠가 너무나 보고 싶어서

이렇게 나의 아빠를 회상해 봅니다.

나는 우리 아빠같은 사람이 없다고 생각해요.

하늘나라에 계신 나의 아빠에게... 아빠 넘 보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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