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을 열고 바깥으로 향할 때 - 56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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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열고 바깥으로 향할 때 - 56
“다신 꾸고 싶지 않은 악몽을 꾼 기분이야.”
디스코팡팡의 후유증은 성진에겐 적잖게 가혹한 것이었다. 그는 한 손에 솜사탕을 들고 다른 쪽 손으로는 내리쬐는 햇살을 가리기라도 하듯 머리에 갖다대곤 그렇게 자신의 심경을 표현하였다. 그들은 서로의 손에 각자의 솜사탕을 들고 보도를 걷고 있었다. 본인이 생각하기엔 매우 적절한 한 줄 요약이었겠지만 옆에 걷는 혜진은 자신의 솜사탕을 홀짝거리며 딴청을 피웠다. 성진이 탈거면 혼자 타지 왜 자신의 의견은 듣지도 않고 같이 탔는지에 대한 원망의 시선을 계속 보내자, 결국 혜진은 뚱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에이, 오빠. 안 어울리게 왜 그래? 나이트나 클럽 등 안 다녀본 곳 없이 잘 노는 형님께서 엄살이셔~”
“그거랑 이거랑 같냐? 게다가 나는 어릴 때 안 좋은 추억이 있어서 디팡만큼은 질색이라고!”
“흐음, 그럼 사과하길 원해?”
“당연히 사과…….”
투덜대며 무의식적으로 내뱉던 성진은 불쑥 자신의 옆얼굴에 밀착하는 혜진을 보며 정신이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디팡 후유증마저도 잠시 잊게 만드는 그녀의 미모이자 매력이기도 했다. 걸음을 멈춰선 성진이 쭈뼛거리며 그녀를 흘끗흘끗 잘 보지 못하는 사이, 혜진은 반대로 성진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속삭이듯 입술을 움직였다.
“어떻게 사과해줄까, 오빠?”
“아니… 괜찮습니다.”
얼굴이 붉어진 성진은, 이젠 점차 익숙해지려는 듯 손바닥을 펴서 재빨리 사양의 의사를 밝혔다. 이렇든저렇든 혜진이 이렇게 들이대기 시작하면 스킨쉽을 포함해 그대로 말려 들어가버릴 가능성이 높다. 그것이 비록 장소가 길거리라 해도.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가만히 바라보던 혜진은 귀엽다는 듯 쿡하고 웃고는 그의 솜사탕을 한입 베어 뺏어 물었다.
“오빠 알고 보면 은근 숙맥이라니까.”
성진은 다시금 울컥하여 뺏긴 솜사탕 조각이 그녀의 입 안으로 채 말려들어가기도 전에 빈정대듯 말했다.
“혜진이 너야말로 은근 헤픈 거 알고는 있냐?”
“내가 뭘?”
성진은 가만히 그녀의 복장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때는 겨울방학이니만큼 눈이 쌓일 정도였지만 혜진은 허벅지 맨살을 다 드러낼 만큼 짧은 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물론 추위 때문에 무릎 위로 올라오는 니삭스에 상의도 두터운 옷을 껴입고 있었지만 성진이 트집을 잡기에는 별 무리가 없다. 그는 다시 걸음을 옮기며 딱딱한 어투로 말했다.
“그런 치마 입고 디팡을 타면 다 들춰졌을 텐데, 지나가는 사람들 다 니 팬티 봤겠다.”
“뭐 어때, 노팬티도 아닌데. 오히려 내 미모에 오빠 말마따나 봤던 사람들은 ‘럭키-☆’라고 생각지 않았을까?”
성진은 베어물던 솜사탕을 조금 입 밖으로 뿜어낼 정도로 풋하고 웃었다. 공주병이라고 치부할 만큼 혜진의 외모에 딴지를 거는 것은 아니지만, 그녀의 사고회로가 참으로 쇼킹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하긴 이렇게 예상밖의 행동들 때문에 늘 그녀에게서 설렘을 느끼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아니면 혹시 오빠, 질투하는 거야? 아무한테나 속옷 보여주고 막 그러니까?”
“질투는 무슨. 그냥 칠칠치 못하다는 겁니다요, 후배씨.”
“에이, 오빠도 보고 싶음 말해. 오빠랑 나 사이에 무슨.”
그리고는 슬쩍 치마를 들춰보이는 혜진의 모습에 성진은 도리어 당황하였다.
“야! 길거리에서 뭐하는 거야! 사람들 다 보잖아.”
“아하하핫.”
혜진은 치마를 도로 내리려고 뻗은 성진의 손을 피하면서 조금 옆쪽으로 떨어져 걸었다. 어찌되든 간에 그녀에게 자꾸만 놀아나는 기분을 느끼게 된 성진은 한 손을 코트자락에 꽂아 넣은 채 솜사탕이나 우물거리며 외면하기로 했다. 그리고는 지나가는 말투로 툭하고 말했다.
“너 원래 이런 애였냐?”
“흐음~. 난 원래 이런 애야.”
“오늘은 어딘가 나사 하나 빠져 보이는데?”
“여자는 사랑을 시작할 때 본성을 드러내진 않아. 시간의 경과가 필요하지.”
그것도 하나의 케이스겠지. 여자는 끝까지 알 수 없는 존재라고 성진은 필터링해버리며 시선을 돌렸다. 문득 그의 눈에 들어오는 한 광장의 분수대.
성진은 다시금 걸음을 멈춰섰다. 그리곤 몇 층짜리 건물의 높이까지 치솟았다가 떨어지는 그 거대한 물줄기들의 자태를 감상하였다. 혜진도 그의 옆에서 솜사탕을 입에 문 채 다른쪽 손으로 스마트폰을 꺼내어 그 경치를 사진 속에 담는다. 그 즈음 성진의 머릿속은 일련의 생각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끝까지 알 수 없는 여자…. 그래, 그녀도 그랬지.
은선영.
본래의 그녀를 지칭하는 건지 현재의 그녀를 지칭하는 건지는 그 자신도 알 수 없었다. 한가지 분명한 건 멀리 떨어진 타지까지 와서 그녀의 생각이 여전히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는 거였다. 분명 집에 있을 때는 왜 있는지 모르는 귀찮은 녀석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게다가 수일 전에 그녀에게 히스테리같은 신경질을 쏟아내고는 여행을 올 때까지 그녀와 말 한마디 안하고 담을 쌓은 것 같다. 그런데 이제 와서 그것이 자꾸 맘에 걸리면서… 왜 녀석 생각이 계속해서 나는 거지.
사랑하고 싶던 본래의 선영이 녀석 안에 틀어박혀있기에 자꾸 생각나는 걸까. 하지만 본래의 선영은 나오지 않는다고 못박았고… 그런데도 나는 여전히 녀석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뭔가 은근 성사되길 기대하는 걸까? 본래의 선영이 녀석 내면에 자리하지 않고 완전히 소멸됐다면, 나는 현재의 선영 따윈 아무 상관 없다고 훌훌 털어버릴 수 있을까? 현재의 선영은… 나에겐 정말 본래의 선영 대행자의 역할 외엔 아무 의미도 없는 존재인가?
“이렇게 있으니까 너무 좋다, 오빠….”
혜진이 슬그머니 그의 팔짱을 끼고 어깨에 머리를 기대왔다.
“그러네.”
성진은 간단히 동의하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이 여자랑 있다는 건 다른 의미로도 행운이다. 혜진과 있을 때는 잠시나마 선영에 대한 복잡한 기분을 잊을 수 있으니. 그리고 성진은 비록 몇 개월도 채 사귀지 않은 사이이지만 어쩐지 자꾸만 혜진에게도 죄책감 비슷한 것을 느껴가고 있었다. 사랑하고 싶은 여자를 잊기 위해 이렇게 자신을 좋아해주는 여자와 ‘사귄다’고 선언까지 하고는 이용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성진은 그 생각 또한 빠르게 잊어버리기로 했다. 혜진은 겉으로는 자신과 평범하게 연애하는 듯하지만 그 와중에 심경을 짚어보는 데에도 예리하다. 어쩌면 벌써 자신의 그런 생각 또한 비슷한 내용으로 짐작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성진은 그 모든 걸 혜진에게 상세히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그녀의 실망이나 분노 등을 두려워해서 털어놓지 않는 게 아니다. 혜진이라면 그의 그 생각까지도 ‘모두 이해해서’ 변함없이 사랑할 것이 뻔했기 때문에 더 미안해지기만 할 것 같았다.
내가 선영을 놓지 못하는 끈과 혜진이 날 놓지 못하는 끈의 대치는 어디까지 이어질까. 이 둘은 너무도 강력해서 어느 한쪽이 쉽게 결판날 것 같지도 않다. 난다고 해도 그 결과 또한 어떨지 짐작이 안 가고. 이 무슨 희대의 희한한 경쟁이란 말인가. 성진은 그렇게 생각하며 자신의 팔짱을 낀 혜진의 머리를 살며시 쓰다듬었다.
아직까지 성진은 혜진을 버릴 수 없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이쪽 또한 포기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이렇게 이쁘고 귀여운 외모에 자신의 마음 속 깊은 곳까지도 이해해주고 사랑하려 하는 여자는 평생 한 번 만날까 말까다. 그런 단순한 사실이 혜진과 그의 관계를 강력하게 다지고 있었다.
‘그냥 결혼해버릴까’
결혼하면 이런저런 복잡한 생각 없이 혜진만 사랑하면 되니까 문제가 없을지도 모른다. 아직 ‘연애’란 단계에서 머무르기에 심경이 불안정한 걸지도. 결혼에 대한 얘기 또한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 수 없지만 혜진이 먼저 얘기를 꺼내기도 했었다. 물론 그것을 차치하고서라도 혜진이라면 쌍수 들고 환영하면 환영했지 절대 반대할 리는 없다. 역시 문제는 나이인가? 아직 대학생이란 신분에….
하지만 진짜 문제는…….
성진의 눈동자에 비치는 광장 분수만이 그의 생각을 날려버리기라도 하듯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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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았던 낮의 날씨만큼이나 밤도 깔끔한 어둠처럼 보인다. 적어도 성진은 그렇게 느껴졌다. 확실히 겨울 날씨답지 않은 화창함이었다. 그리고 야경이 이렇게 뚜렷하게 보이는 이유는… 비단 날씨 때문만은 아닌, 이 인공적인 구조물의 내부에서 거대한 유리벽을 통해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기 때문이다.
관광지인만큼 상당한 높이의 호텔도 많았을 뿐 아니라 내부의 구조도 가지각색이다. 성진은 한쪽 벽이 바깥이 훤히 보이는 유리로 되어있는, 그리고 마치 개인용 대중 목욕탕을 연상케 하는 넓은 욕실과 커다랗게 자리한 바닥 욕조 등등이 구비된 이 스위트룸의 하루 숙박비가 얼만지는 깊게 생각해보지 않기로 했다. 이 경우를 보고 여자친구 잘 둬서 이런 곳도 다 경험해본다고 해야 하나?
“또 뭘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오빠?”
유리벽에 손을 짚은 채 야경을 내려다보던 나체의 성진은 들려오는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엔 역시 나체의 혜진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찰박거리는 물소리를 내며 다가오고 있었다. 물의 온도를 가늠해봤던 것인지 그녀의 맨발은 젖어있었고, 그래서 수증기가 피어오르는 거대한 욕조에서 솟아오른 미녀같이 보였다.
언제 봐도 환상적인 라인이다. 남자는 한 여자에 만족하지 못한다고 하지만 혜진의 앞에서는 별 의미 없는 속설에 불과할 것 같았다. 보기 좋게 큰 젖가슴과 미려한 허리 곡선, 탄력 넘치는 엉덩이와 허벅지 등은 그저 바라보기만 하는 쪽에서도 아찔할 정도의 매력을 발산한다. 성진이 멍하니 혜진의 몸매를 감상하고 있자 혜진은 부끄러운 듯 살포시 웃으며 혀를 조금 내밀어보였다.
“뭘 그리 뚫어지게 봐?”
“너 어디 모델로 활동할 생각은 없냐? 소속사 측에선 대박이라 생각할지도 모르겠는데.”
“오빠도 참. 세상 그리 호락호락하진 않아. 돈 벌기야 쉬울지도 모르지. 하지만… 오빠는 내가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것보다 오빠 혼자한테만 보여지는 게 좋지 않아?”
“무슨… 누드 모델 같은 걸 말하는 것도 아닌데.”
혜진은 킥하고 웃고는 타박타박 다가와서 성진의 곁에 섰다. 그리고는 한 손을 올려서 그의 앞머리칼을 가만히 매만져보았다. 근래에 들어서 조금 기르기 시작한 성진의 앞머리칼은 수분기를 머금고 약간 날카로움을 띠고 있었다. 혜진은 그것도 꽤 마음에 드는지 자꾸만 그의 머리칼을 매만졌고 성진은 그녀가 가까이 밀착해있자 얼굴을 살짝 붉히며 시선을 피했다.
혜진은 그만 풉하고 웃었다.
“귀엽네, 오빠. 대다수의 남자들은 이럴 경우 그냥 확 덮치곤 하지 않나?”
“…나를 다른 남자들과 같다고 보면 곤란하다니까.”
“그 대사 오랜만에 들어본다. 후후… 지금으로선 약점 쪽으로 잡히는 것 같지만.”
성진은 깊게 숨을 한번 몰아쉬었다. 그리고는 시선을 어디다가 둬야 할지 모르는 사람처럼 다시 유리벽 바깥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혜진은 그의 머리칼을 만지는 손을 멈추지 않은 채 재차 입을 열었다.
“뭐 내가 어디 모델로 활동하든 말든 그것은 내 의지가 아니게 된다고 봐도 무방하겠지. 아무래도 우리 집에서의 압박이 심할 테니까.”
“저번 얘기처럼, 딸 고생시키고 싶지 않는다는 너희 부모 말이야?”
“그렇지 뭐. 덕분에 오빠한테 이런 근사한 곳도 구경시켜줄 수 있는 거겠지만.”
혜진도 높다란 천장에 이 넓은 욕실이 개인용인 건 꽤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주변을 한바퀴 휙 돌아보았다. 성진은 그제서야 물어볼 말이 생각났다는 듯 팔짱을 끼고 먼 야경을 응시했다.
“그러고 보니 도대체 이곳 하루 투숙비가 얼마야? 나야 뭐 네가 가자는 대로 하기로 했으니 별말은 않겠는데… 궁금해지는 건 어쩔 수 없네.”
“별로 안 비싸. 더군다나 우리 아빠 기업이랑 제휴를 맺은 곳이니 할인도 많이 되니까 그렇게 부담 갖지 않아도 돼.”
“그래도 몇십만원은 할 것 아냐?”
“흐음~. 나는 남친이랑 며칠 여행 다녀온다고 허락 맡는 게 훨씬 힘들었는데. 오빠는 단순히 액수가 궁금한가보다.”
성진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집에서 모든 걸 다 대주는 부잣집 자제와 용돈벌이 정도는 혼자서 해야 하는 평범한 가정과는 민감한 문제 자체가 다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성진은 혜진이 철부지 여자라고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또래 애들에 비해 정신적으로도 상당한 성숙함을 가진 그녀였고, 가끔씩 나사 하나 풀린 듯 툴툴거리거나 애교를 떨어도 근본은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예전에 언급했던 서브컬쳐 얘기를 감안한다 해도 참 여러가지로 궁금해지는 녀석이다. 사랑스러우면서도 신비로운이랄까.
성진은 그만 미소 띤 얼굴로 한숨을 폭하고 쉬고는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래서, 오늘은 또 얼마나 뽑아가실 생각입니까, 희대의 요부씨?”
“얼마나 뽑아가다니, 뭘?”
“이거 말이야, 이거.”
성진은 손가락으로 자신의 자지를 가리켰고, 혜진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것을 쓱 내려다보더니 고개를 갸웃하며 그를 마주보았다.
“그건 왜 물어보는데?”
“넌 스위치만 올라가면 아주 마성의 여자가 되잖아. 시작하기 전에 나도 대비를 좀 해야지. 그렇잖으면 어떻게 너란 여자를 감당…….”
“이미 시작했는데?”
성진은 의아한 표정으로 혜진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혜진은 여전히 그의 머리칼만 만지작거릴 뿐이다. 잠시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성진은 아득한 짐작 속에서 그녀의 말에 부합하는 가설을 떠올리고는 설마 하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혜진은 오빠의 경악스런 표정은 전혀 신경쓰지 않은 채 그의 머리칼만 멀뚱히 응시하면서 손가락으로 그것을 이리저리 헤집어보고 있었다.
“어… 너, 머리카락 페티쉬 있냐?”
“실례야, 오빠. 그렇게 직설적으로 물어보는 건.”
거기까지가 혜진의 무표정의 끝이었다. 그녀는 이윽고 살짝 웃더니 손가락을 성진의 뺨으로 살며시 늘어뜨렸다.
“하지만 대답은 해줄 수 있지. 어렵게 생각할 필요 하나도 없어.”
“뭐… 뭘?”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그 어떤 것이라도 페티쉬가 될 수 있다는 사실.”
성진이 그녀의 말에 동의할 틈은 없었다. 혜진의 손이 다시금 그의 머리카락으로 올라가더니 그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았기 때문이다. 성진은 그녀의 외모가 무척이나 아름답지만 가끔씩 눈을 볼 때마다 은근 무서운 기분을 받곤 했다. 눈매 자체가 날카롭다거나 무서운 건 아니지만 그녀의 섬세한 무늬의 눈동자에서는 상대의 영혼을 살펴보는 기운이 서려있었다. 적어도 수없이 혜진과 눈을 마주쳐본 성진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까지 다 들여다보는 것은 아닐까 하고 성진이 여기고 있을 때쯤, 혜진이 얼굴을 살짝 붉혔다. 그리고는 성진에게 한걸음 다가서서 밀착하며 깊은 숨결을 내뱉었다. 그녀의 뜨거운 숨결이 성진의 목덜미에 와닿았다.
“그리고 이렇게나 젖어버릴 수가 있어.”
“……!”
혜진의 다리 사이를 촉촉이 적신 보짓물이 성진의 자지에 와닿았다. 성진의 머리카락을 만지면서 그녀의 내면은 벌써부터 일련의 반응이 일어나버린 것이었다. 성진은 그것을 깨닫고는 뜨거운 기운이 가슴 속에서 퍼지는 것을 느낌과 동시에 자지가 치솟아 올랐다. 단숨에 벌떡 하고 솟아오른 자지 끝이 혜진의 보지 근처 골반에 닿자 그녀는 살짝 눈을 내리깔며 조용히 속삭였다.
“아니면… 사과하길 바라는 거야?”
“사… 사과라니, 그게 무슨…?”
혜진은 대답 없이 성진의 가슴을 손바닥으로 톡하고 밀었다. 별로 세게 민 것도 아니지만 성진은 자신의 머리카락에 흥분해버린 혜진에게 충격을 받은 상태라 그대로 욕실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한치의 오차도 없이 자신의 의도하는 바 그대로 움직이는 오빠를 보며 혜진은 잠시 쓴웃음을 지었다. 아 진짜, 나한테 너무 꼼짝을 못하니 재미가 없을 정도잖아.
혜진은 반쯤 눕듯 주저앉아버린 성진의 다리 위에 걸터앉았다. 그리고는 그의 입술에 손가락을 갖다대었다. 멍청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오빠의 시선은 상관도 않은 채, 혜진은 그의 입술을 검지손가락으로 이리저리 매만져보았다. 그러다가 그녀는 손가락을 입술 안쪽에다가 쏘옥 넣었다. 성진은 무의식적으로 그녀 손가락이 사탕이라도 되는 양 입에 물었다. 마치 어린애처럼 자신의 손가락을 쪽쪽 빨아대는 성진은 보며 혜진은 터져나올 것만 같은 웃음을 간신히 제어해야 했다.
혜진은 살며시 미소 띤 얼굴로 다른 쪽 손을 들어서 유리벽 바깥을 가리켜 보였다. 성진은 손가락을 입에 문 표정 그대로 그녀의 손길을 따라서 시선을 돌렸다. 곧 혜진도 고개를 돌려 같은 곳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무슨 사과이긴. 벌써 잊어버린 거야? 저어기 우리가 갔던 아케이드 게임장이 있잖아.”
성진은 그 거리가 상당히 먼 데다 어두운 밤이라 그것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가늠하지 못했지만, 시력이 좋은 혜진은 벌써 찾고도 남았다. 혜진은 성진이 헤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상관하지 않고 이번엔 그의 귓가에 입술을 갖다 댔다. 그리고는 조용히 일깨워주듯 속삭였다. 한 글자씩 또박또박.
“디.팡.에.대.한.사.과.말.야.”
성진은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것처럼 입에서 그녀의 손가락을 뺀 후 반문했다.
“뭐어? 그… 그건 안 해도 된다고 대답하지 않았나?”
“우음…. 나는 하고 싶은데.”
혜진은 그의 입에 넣었던 손가락을 회수해 자신의 입에 물고는 성진을 내려다보며 웅얼거렸다. 성진은 그런 건 하지 말라고 소리지르려다 문득 주변을 둘러보곤 아무도 없는 현 장소를 자각했다. 별 상관 없잖아, 그러면? 게다가 이렇든저렇든 이 녀석과 여행을 왔다면 섹스는 안 하고 지나칠 수도 없는 것이다. 평상시에도 하루가 멀다 하고 하는 게 혜진이 타입인데.
결국 성진은 자포자기 심정으로 툭하고 내뱉었다.
“……그럼 하든지.”
그 어정쩡한 대답을 완벽한 승낙처럼 여긴 듯 혜진은 두 손을 맞부딪치고 환하게 웃었다. 그 표정은 일반적으로 사과를 해야 하는 쪽에서는 절대 어울리지 않을, 마치 “Congratulation!”이라고 자찬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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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이어집니다.
여전히 완벽한 여자 혜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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