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을 열고 바깥으로 향할 때 - 50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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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열고 바깥으로 향할 때 - 50







역시 이번에도 대답 없는 선영. 그리고 태환은 새 담배를 꺼내려고 손을 뻗었다가 허공을 더듬게 되고, 간신히 찾아서 입에 물고도 몇 번이고 불을 붙이는 데 실패하는 자신을 깨닫고는 당황했다. 그는 곧 그런 자신에게 조**도 보내듯 한숨을 쉬면서 미소를 지었다.



‘뭐야, 헤어진 지 한참이 지나고도, 그것도 본래의 그녀가 아닌 새롭게 태어난 그녀인데… 다른 남자한테 신경 쓰인다는 느낌이 드니 심적 동요가 이는 건가? 이런 같잖은… 꼴에 남자라고 나도 이런 어이없는 질투심이 들 줄이야.’



역시 성진이란 녀석과 그녀는 한집에 같이 살다 보니 정이라도 든 건가? 그런 생각을 하던 태환은 그 따위 생각들은 집어치우기로 마음먹고는 담배연기를 깊게 들이마셨다가 내뱉었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자판을 두들겨서 (정작 그는 대답을 듣지 못했지만)위로의 말로 넘어갔다. 문득 그는 선영의 표정을 살피고 싶다는 충동을 강하게 느꼈다.



「불가항력적인 상황은 당시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더 나은 해결책을 내기 어렵지. 네가 움직일 수도 없고 기댈 곳도 없었던 건 사실 아니었니? 그래서 지금까지 어쩔 수 없이 얹혀 지내온 것이고. 너무 죄책감 가질 필요 없어」



「나는 그에게 피해만 주는 존재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거야」



태환은 그녀의 채팅 속에 담긴 ‘피해’라는 단어가 자꾸 언급되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선영의 말이 끝나자마자 거의 곧바로 타이핑을 했다.



「그를 좋아하고 있니?」



「……뭐?」



효과가 있군, 이렇게 되묻는다는 건.



「연애에 대해 모르는 상태라 했으니 보충 설명이 필요할 것 같군. 좋아하는 사람끼리는 피해라는 개념이 희한하리만큼 완화되지. 자신이 희생하는 것은 그만큼 상대를 위한 것이고,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야. 그러나 너는 자신이 그 김성진이란 녀석에게 그럴 만한 가치가 발현되지 않는 존재였고, 그것을 자각함으로 인해서 자신의 존재성에 의심을 품게 된 것 아니니?」



그리고 대화는 끊긴 것처럼 아무 메시지도 올라오지 않았다. 시계의 초침은 한량없이 돌아갔다. 하지만 태환은 그녀가 대화를 거부했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녀는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연애에 대해, 더 나아가서 사랑이란 것에 대해. 하지만 알기 어렵겠지. 이제 막 세상을 살아가는 그녀의 입장에서 본다면.



한참 후, 어렵게 키보드 자판을 두들긴 듯한 메시지가 띄워져 올라왔다. 태환이 두 번째 담배를 다 태우고 비벼 껐을 무렵이었다.



「…알 듯 모를 듯해. 하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모르는 쪽에 가까워. 왜냐하면 좋아한다는 감정의 유무를 떠나 그게 어떤 의미였는지부터 의구심이 들거든. 그래서 난 그를 좋아했는지 말았는지도 모르겠어」



「이해해」



「김성진은 내 병원비를 모두 부담하고, 내가 치료를 원활히 할 수 있도록 거처를 제공하고, 숙식과 용돈, 옷과 컴퓨터 사용비 등등 잡다한 것들을 모모 부담했지. 물론 학생의 입장에서는 엄청난 부담감이었겠지만 나는 그에게 늘상 만족하지 못할 정도로 빈곤하게 산다고 불평만 해댔어. 사실 이건 넘기 힘든 현실이란 벽 앞에서 그나 나나 발버둥치고 있을 뿐이라고 은연중에 나 또한 인정하고 있었어. 그래서 이면으로는 감사하단 마음이 자리하고 있었는지 몰라. 하지만 그게 좋아하는 감정이었을까?」



「네가 그것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 또한 이해해」



「여전히 잘 모르겠어. 하지만 단순히 감사하다는 마음이었다면, 그가 그렇게까지 화를 낸 것에 대해 이렇게 상처받진 않았을 거야. 나는… 창오빠의 말대로 그에게 다른 면으로도 무언가를 기대하고 있었는지도 몰라…」



태환은 한가지 더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이 있음을 말해야 하나 짧게 고민했다. 그 한가지란 것은 그녀가 성진에게 가지고 있는 감정이 본래의 선영이 가진 감정과도 영향이 있어서 생기게 된 건지 어떤건지에 대한 구분이었다. 하지만 태환은 결국 더 이상은 언급하지 않기로 했다. 정확히 성진과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현재의 선영은 이미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혼란스러웠으니.



따지고 보니 현재의 선영은 어이없을 정도로 어렵고 무거운 과제에 떠밀려 있군. 평범한 인간들도 사랑을 알기 어려워서 혼란스러워하는 게 보통이다. 하물며 급작스럽게 이 세계를 살아가야 하는 현재의 선영은 자신의 감정을 처리하기에 앞서 그 감정이 순수한 자신의 감정인지조차 명확지 않다. 왜냐하면 그녀 속에 잠식해있는 본래의 선영 감정이 영향을 미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본래의 선영은 역시 너무 잔인하고 무책임한 녀석이야. 김성진도 그런 그녀에게 호되게 당하진 않았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태환은 꼬이고 꼬여버린 상황에 머리를 싸쥐는 일을 잠시 미루고 자판 위 손가락들을 움직였다.



「초조해할 필요는 없어, 선영아」



「……」



「네가 이 세계를 오래 살아보지 못해서 더 이해하기 힘들다는 건, 반대로 말하면 앞으로 살아감으로 인해서 네 존재성을 부여 받을 소지도 충분하다는 걸 의미해. 과거의 네 본래 모습이 어땠는지, 자신이 왜 이 세계에 살아야 하는지는 이제 막 세계에 익숙해져가는 네가 벌써부터 고민해봤자 득이 없어. …김성진의 기분이 어떤가에 대해서 또한 네 입장에서 할 수 있는 것 정도만 처리해. 그가 널 어떻게 생각하든 그건 그가 알아서 할 문제야. 너는 네 나름대로의 목적에 정진하며, 네가 신경 쓰고 있는 것만큼 그가 널 신경 쓰고 있다는 기분이 들 때, 대화를 시도해」



「…고마워, 창오빠」



태환은 그제서야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면서 긴 한숨을 쉬었다. 이 녀석, 제대로 이해하긴 한 걸까. 그리고 태환은 너무 오랫동안의 대화와 무거운 주제로 인해, 본래 자신이 얘기하려고 했던 문제에 대해서는 다음으로 미루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다. 먼저 말을 걸었음에도 아무런 용건을 밝히지 못했지만 태환은 이미 그런 상황들에 익숙해지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태환이 간단한 인사말을 남기고 접속을 끊으려던 찰나, 떨어지려는 그 무언가를 잡아올리듯 선영은 맞인사 대신 다른 메시지를 띄웠다.



「그런데 오빠…. 무슨 할 말 있던 거 아니었어?」



그토록 어두운 대화를 진행하고서도 그러한 사실을 떠올리는 선영의 모습에, 태환은 감탄이라기보다는 신음 비슷한 한숨을 흘렸다.



「아니, 다음에 얘기할게」



「지금 해」



태환은 괜찮다고 말하거나 그냥 인사말만 남기고 접속을 끊지는 않았다. 이 녀석이 그렇게 말할 때는 그렇게 해야 한다. 이미 선영의 그러한 화법에 익숙해져 있는 태환은 또다시 짧은 한숨을 쉬고는 키보드를 재차 두드렸다. 손가락 움직임은 비슷하지만 글의 주제는 완전히 다른.



「네가 지금까지 ‘카잔 전쟁’ 대회를 참가한 횟수… 총 6번으로 아는데, 맞니?」



「응」



「최근 몇 경기는 결승전이 게임 채널에 방영될 정도로 규모가 조금 컸지. 너는 현재까지의 경기들에서 모두 우승을 차지했고 나는 방영된 경기들을 돌려보면서 문제점… 을 찾게 된 것 같아서 말야」



선영은 혹시 기자들의 집적거림에 관한 것일까 하고 긴장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띄워진 태환의 메시지는 그런 그녀의 예상을 빗나가게 함과 동시에 고개를 갸웃하게 만들었다.



「네 ‘카잔 전쟁’ 플레이에 약점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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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보통 새 제품을 사게 되면 처음 얼마간은 약간의 흠집이라도 날까봐 조심스럽게 사용하기 마련이다. 물론 시간의 섭리를 거스를 수는 없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티끌 하나 없는 완벽한 모습을 오래 유지하고 싶어서인데, 그런 공감대에 속해있지 않는 행동을 보여주는 남자가 있었다. 카페에 퍼지는 감미로운 음악의 선율 또한 완벽히 무시하기라도 하듯 그 남자는 탁자 앞에 놓인 새 제품인 넷북 자판을 신경질적으로 두드려대고 있었다.



넷북 모니터에 띄워진 웹페이지 정보는 말 그대로 넷북의 탓이 아닐 테지만 남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하다.



“젠장할. 멍청한 기자 녀석들, 그렇게까지 정보를 흘려줬는데도 그 정도 취재밖에 못하나? 하여간 인터넷에는 쓰레기 기자들밖에 없다니깐.”



홍준석은 웹페이지 곳곳에 띄워진 선영의 기사를 보며 불만에 가득 찬 목소리를 토해내었다. 그리곤 곧 누가 들을까봐 흠칫하곤 곁에 놓인 커피를 빨대로 쭉쭉 빨아대었다. 커피의 맛이나 향 따위는 그의 현 행동에 비추어볼 때 전혀 상관이 없는 모습이었다.



준석은 다시 넷북의 터치패드를 신경질적으로 돌려대며 중얼거렸다.



“현재까지 이루어진 총 6개의 ‘카잔 전쟁’ 아마추어 경기 모두 우승. 쏟아지는 프로게이머 제의를 모두 거절하는 것으로 봐서 단순한 상금헌터로 보이나 용도를 알 수는 없음. 가방에 늘 젤리를 넣고 다니며 대전자에게 건네는 퍼포먼스는 최근 보이지 않음. 추정되는 이유는…? 뭐 이딴 시시한 것들이라니 제기랄!”



그는 다시 분을 참지 못하고 탁자를 쾅 내리쳤다. 때는 화창하면서도 느지막한 오후 시각이라 가게 문을 활짝 열어놓고 대걸레로 바닥을 닦던 여자 아르바이트생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준석은 곧 그녀와 눈이 마주치곤 머쓱하게 고개를 돌리려다 그녀의 미모에 혹해서 다시 자세히 바라보았다. 카페 유니폼 밑으로 보기 좋게 뻗어 나온 다리 각선미. 그는 비릿한 웃음을 지었고 여자는 재수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휙하고 돌렸다. 왠지 그의 자리 근처는 닦으러 올 것 같지도 않았지만 준석은 한동안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다시 넷북으로 시선을 주었다.



“그나마 보람되는 건 ‘카잔 전쟁 급부상 여신 은선영의 평상 모습 밀착취재’ 정도로군. 원룸에서 독신생활 하는 것으로 보인다든지, 늘 혼자 PC방이나 메이크업 장소를 돌아다닌다든지 하는 별 거 아닌 것들이긴 해도. 서서히 연예인급으로 유명해지고 있으니 관심 있는 사람들에겐 이런 몰카나 기습 인터뷰 등이 간절해지는 법이지.”



그리곤 잠시 기삿거리를 눈여겨보던 준석은 엄지손톱을 이빨로 씹으며 의아한 목소리를 내었다.



“그런데 항상 혼자라고? 저번에 내가 그녀 집앞에서 만났던 성진인가 하는 놈은 역시 걔와 아무 관계가 아니었나? 제기랄, 또 뺨이…. 어쨌거나 날 후려쳤던 그 녀석 손엔 상당한 감정이 실려있던 것 같은데, 이 기자놈들 제대로 살펴보긴 하는 거야?”



욕을 섞어가며 계속해서 중얼거리던 준석은 문득 핸드폰을 열어보고는 이미 연습시간에 늦었음을 깨닫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시간이 벌써…. 그는 빨리 메지즈 구단의 ‘카잔 전쟁’ 연습실로 돌아가야 한다는 일념으로 넷북을 서둘러 파우치에 쑤셔 넣었다. 그리고는 가게 입구로 얼른 뛰어갔다. 활짝 열려있는 문을 나서기 직전, 준석은 아까 그 이쁜 아르바이트생을 한번 더 살펴볼 양으로 카페 내부를 쓱 돌아보았다.



퍼억-.



그가 앞을 보지 않고 걸어가는 사이, 가게 내부로 들어오는 누군가와 맞부딪혔다. 꽤나 퉁퉁한 몸하고 부딪혔다 생각한 순간, 준석은 반사적으로 황급히 그 누군가를 살피지도 않고 허겁지겁 자리를 떴다. 그의 입으로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중얼거림을 끊임없이 내면서. 부딪힌 그 누군가는 어이없다는 시선으로 그런 준석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물론 아는 사람도 아니고 말 그대로 단순히 부딪힌 것이었기에 외상은 전혀 없었으나, 그의 기분을 한순간 상하게 만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뭐야, 저 녀석은. 앞도 제대로 보지 않고 부딪쳐놓곤 사과도 없이 그냥 가? 뭐하는 자식이지?”



“쫓아가서 깽판 좀 부려볼까요, 선배?”



“야, 야. 됐다. 에휴…. 안 그래도 요즘 심기가 불편한데, 다 귀찮다.”



규한은 무슨 할아버지 같은 소리를 하냐며 킥킥 웃고는 카페 내부의 적당한 테이블에 동혁과 마주 앉았다. 규한은 재미있는 상황이 벌어질 뻔했는데 아쉽다는 시선으로 준석이 사라진 카페 바깥을 자꾸만 흘끗거렸다. 그리고는 메고 있던 가방을 옆 의자에 걸치면서 말했다.



“저런 것들은 따끔하게 혼을 내줘야 매사에 처신을 잘하고 다니죠. 안 그럼 정신 못차리고 또 똑같은 피해를 사람들한테 주고 다닌다니까요.”



“그건 반대로 말하면 굳이 우리가 아니라도 언젠가 호되게 당할 녀석이 뻔하다는 거지. 난 시끄러워지는 거 질색이니 커피나 시켜.”



“뭐 마실래요?”



“에스프레소.”



규한은 카운터에 가서 에스프레소와 카페라떼를 주문한 후 호출기를 갖고 돌아와 다시 마주 앉았다. 규한은 손가락으로 슬쩍 카운터의 여자 아르바이트생을 가리키며 피식 하고 웃어보였다.



“쟤 이쁘지 않아요, 선배?”



동혁은 그가 가리키는 쪽으로 시선을 잠깐 주더니 태블릿PC를 꺼내서 인터넷 사이트를 몇 개 띄워놓고는 의자에 등을 편하게 기댔다. 그리고는 긴 한숨을 쉬며 규한을 바라보지도 않고 입을 열었다.



“요즘 들어 나한테 붙어있다시피 따라다녀봤자 여자 안 생긴다.”



“에이, 그러지 말고 한번만 소개시켜줘요, 선배! 존경하는 선배님!”



“이럴 때만 ‘존경하는’ 선배냐?”



“제발…. 저도 긴긴 대학의 겨울방학 동안 훈훈한 청춘을 만들어보고 싶단 말이에요.”



“윤지 가질래?”



우웅-.



그냥 해본 말이겠거니 생각하던 규한은 그가 애매한 표정을 짓고 있음을 깨닫고는 호출기 알람과 동시에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주문한 커피를 갖고 돌아와서 에스프레소를 동혁에게 건네었다. 규한은 잠시 후 의아한 표정으로 물어봤다.



“나윤지요? 걔 선배랑 지금 사귀는 거 아니에요?”



에스프레소의 맛을 한 모금 음미한 동혁은 여전히 태블릿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헤어질 거야.”



“에에? 걔 선배를 죽자살자 좋아하며 따라다녔잖아요. 걔가 헤어지자고 했어요? 왜 갑자기…….”



“내가 그냥 조만간 끝내려고.”



단조로운 목소리. 규한은 갑자기 궁금한 게 산더미같이 몰려오며 더 물어보려 했지만 곧 본능적으로 제어했다. 털어놓는 술자리도 아닌데 괜히 호들갑 떨 필요는 없지. 그렇게 생각한 규한은 침묵을 일관하기로 했다. 서로 커피를 홀짝거리며 각자 생각과 태블릿을 만지던 그들. 그리고 얼마간의 정적 후에 규한은 선배의 표정을 조심스레 살피며 입을 열었다.



“혹시… 성진 선배가 했던 말 때문인가요?”



태블릿을 이리저리 터치하며 웹사이트를 둘러보던 동혁의 손가락이 멎었다. 물론 잠깐이었지만 규한은 대답 없는 동혁을 보며 자신의 직감이 맞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다른 여자를 겁탈한 후의 상황을 두눈으로 보고도 계속 사귀겠다고 했던 윤지의 태도를 비꼰 것 때문 아닌가요.’



규한은 그렇게 머릿속으로만 질문하고는 카페라떼 컵에 꽂힌 빨대만 쪽쪽 빨아대었다. 죄책감인지 무엇인진 알 수 없다. 그저 그때 공터에서의 대치 후로 쭉 마음이 편하지 않은 것이겠지. 규한은 그쯤에서 생각을 닫고는 짐짓 아까 그 여자 아르바이트생을 돌아보았다. 무심한 듯하지만 상큼한 외모가 자꾸만 그를 설레게 한다. 한동안 그녀가 계산대를 두드리는 것만 보고 있던 규한의 귀로 동혁의 지나가는 말투가 흘러들어왔다.



“김성진이랑 요즘 같이 다닌 적 있냐?”



규한은 고개를 바로 해서 동혁을 바라보았다. 동혁은 여전히 태블릿을 내려다보며 웹사이트 검색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하지만 규한은 그가 ‘집중하는 척’하고 있으며 지나가는 말투로 질문한 것 또한 여러 의미가 담겨 있음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그는 어떤 어조로 대답해야 하나 잠시 고민하고는 일단 질문 그대로 가볍게 되돌려주기로 했다.



“에이, 동혁 선배랑도 만나지 않던 것 같은데, 저라고 같이 다니겠어요?”



“역시 그렇지? 그런데 그 녀석 요즘 가만 보면… 이해할 수가 없단 말야.”



무슨 소리냐는 시선으로 규한이 바라보는 것도 잠시, 동혁은 태블릿을 손으로 잡아 수직으로 세운 후 모니터를 규한이 볼 수 있는 방향으로 빙글 돌렸다. 규한은 태블릿에 띄워진 웹페이지 정보들을 보고는 의아한 목소리를 내었다.



“이건…?”



“그래. ‘카잔 전쟁’의 각종 대회에서 요즘 한창 뜨고 있는 유명 인사지. 그것도 우리 학교에서 한때 잠시나마 소동을 벌였던 은선영. 벌써 넷상에서는 게임계의 여신이 강림했다며 추종하는 팬카페와 사이트, 그녀와 관련된 각종 기사들이 쏟아지고 있고 스폰서 제의 또한 상당하다고 들었어.”



“저도 얼핏 들어서 알고는 있었지만… 이 정도로 대단할 줄은 몰랐네요. 불과 몇 경기 치르지도 않았는데 그런 파급효과를 가져올 정도면….”



“한 선수가 거의 완벽하게 상대들을 제압하며 상금을 휩쓰는 것도 모자라, 미모가 뛰어난 여자이기까지 하니 임팩트가 번지는 건 새삼 놀라울 것도 아니지. 내가 이해할 수 없다는 건 이게 아냐. 앞서 말했듯 김성진 말야.”



“이게 성진 선배와 무슨 상관이란 거죠?”



“걔 아직도 선영이랑 동거하는 것 같아.”



가만히 자신의 생각을 말하던 동혁은 문득 규한이 이상하다는 표정을 짓는 걸 깨달았다. 그는 의자 등받이에서 등을 조금 떼면서 에스프레소를 한모금 빨고는 입을 열었다.



“아아, 너는 애초에 걔가 선영과 동거한다는 사실부터 잘 모르나 보군.”



“아뇨. 동혁 선배가 그 때 한번 얘기한 적이 있어요. 그런 것보다는… 저도 어쩐지 선배가 이해할 수 없다는 부분을 알 것도 같은데요.”



“응? 그럼 한번 말해보겠나?”



규한도 자신의 카페라떼를 쭈욱 빨아들여 목을 축인 후 긴 한숨과도 같이 말했다.



“사실 성진 선배한테는 만인의 부러움을 사는 캠퍼스 커플이 따로 정해져 있잖아요. 강혜진. 그런데 웃기게도 한편으론 요새 한창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선영과 동거까지 하고 있단 말이에요. 여기까지 보면 흔한 양다리라 볼 수도 있겠지만… 이런 제길! 부러워 죽겠다는 얘기 한번 하고 넘어갈게요. 어쨌거나 더 이상한 건 혜진과 함께 다니는 건 심심찮게 보이는 반면 선영과는 동거 외에는 그 어떤 접점도 없다는 거에요. 심지어 기자들도 선영이 솔로인 줄로만 안다니까요. 도대체 이들의 관계를 어떻게 봐야 할지 저도 짐작이 안 가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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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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