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미시마 다케오의 여인추억 1 ... - 1부 3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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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나비가 된 여자



미찌꼬의 모습을 통 볼 수가 없었다. 석탄 창고에서의 만남은 정말 꿈 같은 일이었다. 미

요와 사귄다는 것도 말이야 좋지만 어려운 일이었다. 어차피 그녀는 몸 파는 여자였고 마사

오와의 세계는 그녀 말대로 너무나 달랐다.

가을이 깊어 갈 무렵이었다. 마사오는 교실에서 창밖을 내다보며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

지들을 물끄러미 감상하고 있었다. 그때 누가 와서 어깨를 짚었다. 뒤돌아보니 긴이였다. 미

찌꼬와의 그 희안한 만남을 주선한 후론 잘 만날 수가 없던 녀석이었다.

"미찌꼬가 없어졌어."

교실 밖으로 나오자마자 녀석은 다짜고자로 말해 왔다.

"뭐?"

"가출했대. 이유는 모르겠어. 우리하고 그리 가깝게 지낸 사이는 아니었지만 미찌꼬는 좀

비밀스럽고 쌀쌀맞은 데가 있었어.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몰라."

"학교는 자퇴한 거야?"

"그런 것 같아. 항상 꿈 같은 소리만 하는 애였으니까 또 뭘 찾겠다고 사라진 건지도 모르

지. 그런데, 며칠 전에 날 찾아왔었어. 너희 집을 가르쳐 달라고."

"그래서 가르쳐 줬니?"

"물론 가르쳐 줫지."

"끄때 미찌꼬를 붙들어두지 않았단 말이야?"

긴이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난 그런 사람은 못 돼. 한번 만나면 잘 살라고 전해나 줘. 그리고 영원한 이별이라면 영

원히 잘 살라고."

"너, 그날 그 애랑 나 무슨 일 있었는지 아니?"

"아니 몰라."

긴이는 또 픽 웃었다.

"뻔하지 뭐. 어차피 돈도 힘도 없는 십대의 남자와 여자가 만나 뭘했겠어? 몸과 몸이 만날

뿐이지. 관심없어."

긴이가 다녀간 며칠 후였다. 일요일이라 집에 있었는데 아침 일찍 누가 마사오를 찾아왔

다. 퍼머 머리의 미찌꼬였다.

"나 가출했다는 소리 들었니?"

"응."

"그거 거짓말이야."

"뭐라고?"

"실은 가출한 게 아니야. 나 수녀원에 들어가."

미찌꼬는 그 반짝이는 눈으로 마사오를 쳐다보았다.

"수녀원?"

"후후후, 놀랬지? 그것도 거짓말이야. 홋카이도에 가는 커야 이유는 간단해. 그냥 먼 곳이

니까. 학교는 이제 안 가. 따분하거든. 그곳에는 아무도 성가시게 구는 사람도 없을 거야.

자유롭게 사는 거지. 가출하는 게 아냐. 가족들에게 허락을 받았어."

"그래? 다행이구나."

"그리고 나…, 너를 유혹하러 왔어. 나와 함께 가지 않을래?"

"싫은데."

"그래. 네가 그렇게 나올 줄 알았어. 알면서도 같이 가자고 해 보는 건 그것이 도리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야. 그리고 다시 한번 널 만나 보고 싶어서. 역까지 바래다 주지 않을래?"

"그러지."

"자전거는 싫어. 너무 빨리 가니까."

"그럼 걸어갈까?"

두 사람은 나란히 서서 걸었다. 조용한 아침이었다. 가을 아침의 공기는 갓 풀먹인 옥양목

처럼 풋풋했다.

"어디에 가는지는 말하고 싶지 않아. 그냥 인사하고 싶어서 왔을 뿐이야. 새 주소를 말해

주는 건 어리석겠지?"

"그럴지도 모르지."

"…전에 있었던 일 잊었어?"

"잊지 않았어. 잊을 수 없었어. 어쩌면 평생 동안 기억하게 될지도 몰라. 하지만 이것도 점

점 희미해져 가겠지. 어쨌든 어디인지도 모르지만 그곳에 가서 새 애인을 만나기 바래."

"애인?"

"응. 하지만 네 애인이 되는 남자는 좀 불행할 거야."

"왜?"

"왠지 그런 기분이 들어."

"다에꼬와는 잘 돼 가?"

"글쎄."

"전에 일부러 다에꼬를 보러 갔었어. 나 이상하지? 경쟁 의식은 아니야. 그냥 흥미 때문이

었어."

"만났어?"

"아니. 나만 몰래 얼굴만 봤어. 다에꼬가 우리 사이 모르지?"

"모를 거야."

"그러면 됐어. 산다는 건 모두, 그러면 됐어 하는 건지도 모르지."

"그후에 누구와 무슨 일이 또 있었니?"

"아니, 전혀. 실험은 한 번으로 충분해. 나는 쓸데없는 짓은 하지 않아. 그래서 널 만나고

싶은 것도 참았어. 대부분의 여자들은 그런 걸 못 참나 봐. 그래서 자신을 그 올가미로 점

점 몰아넣지. 그러나 난 안 그래. 난 그 정도는 극복할 수 있어. 아까 너 봤을 때도 나 침착

했지?"

"난 떨렸어."

마사오가 다시 말을 이었다.

"홋카이도는 추울텐데."

"괜찮아. 냉혹한 자연이 어정쩡한 인간 관계나 인습보다는 차라리 더 좋아. 홋카이도까지

간 보람도 있을 꺼고. 나 거기서 일할 거야. 어쩌면 주제넘는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난 아

주 심각하게 생각한 거야."

"무슨 일을 할 건데?"

"목장일. 숙부님이 목장을 경영하고 계셔. 거기 가서 정말로 일을 할 거야. 난 노동자로 가

는 거야."

"숙부님이 계시다니까 마음이 좀 놓인다."

"나는 무턱대고 경솔한 짓은 안 해. 모두 계산대로 하는 거야."

"어쨌든 안심했어. 건강 조심해."

"고마워."

미찌꼬가 잠시 마사오를 빤히 바라보더니 팔을 붙들며 말했다.

"너 진짜 나랑 같이 안 갈래?"

"안 돼."

"그렇겠지. 그래 그만두자. 그런데 참 이상한 게 있어. 우린 처음 만나서 잠깐 서로의 몸

속에 들어갔던 것뿐인데 그 일로 이렇게까지 친밀감이 들다니 정말로 이상해."

"이상한 건 바로 너야."

맞은편에서 사람이 걸어오는데도 미찌꼬는 팔을 놓지 않았다. 오히려 더 다가와 몸을 기대

기까지 했다.

"보고 싶어지면 편지 쓸게."

"기다리지."

"이제 미련은 없어. 그냥 너와 이렇게 걷고 싶었어."

"난, 널 두 번 다시 못 볼 거라고 생각했었어."

"나도 그랬어. 하지만 역시 만나서 인사하고 떠나는 게 도리라고 생각했어."

"도리(道理)?"

그 말은 방금 전에도 미찌꼬가 한 말이었다. 괜한 말이 아닌 것 같았다.

"응. 그리고, 우리 둘은 이미 그런 일을 치른 사이잖아. 나도 여자야. 다에꼬와는 좀 다르

겠지만."

"아뭏든 이렇게 찾아 주어서 고마워. 그냥 해어졌더라면 참 이상했을 거야."

갑자기 미찌꼬가 마사오의 팔을 움켜쥐듯 붙들며 마사오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마사

오는 멈춰섰다. 미찌꼬가 바싹 다가왔다.

"만약 내가…." 낮았지만 힘있는 목소리였다.

"지금 저번의 석탄 창고에 가자고 한다면 가 출래?"

직감으로 마사오는 알 수 있었다. "진심은 아니야. 나를 또 시험해 보겠다는 거지? 그래.

그게 여자의 자존심이라면 지켜 드리지."

"가고말고."

"저번처럼 날 안아 줄래?"

그러지."

"고마워. 아아, 이제 안심했어. 말만으로도 충분해. 역시 오길 잘했어."

미찌꼬는 고개를 기대어 왔다. 역에 도착했다. 열차가 도착하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었다.

두 사람은 대합실의 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목장 이야기는 사실이야?"

"날 못 믿겠어? 정말이야. 그럼, 소 젖을 짜고 있는 사진을 보낼게. 내가 네게 거짓말을 하

겠니?"

개찰이 시작되었다. 마사오는 역원에게 양해를 구하고 플랫포옴까지 따라 들어갔다.

"생각해 보니까 너와 차음 만난 것도 기차 안이었어."

"그때는 무척 놀랐었어. 불량해 보이지도 않았는데 참 이상한 사람도 다 있구나 했지."

"저…." 미찌꼬가 마사오의 귀에 입을 갖다대었다.

"나, 아까 너를 만났을 때부터 죽 젖어 있었어. 사실은 아무도 없는곳으로 너와 함께 가고

싶어."

"지금도?"

"응."

미찌꼬의 눈도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그럼 갈까?"

"아니."

미찌꼬가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이대로 미련을 남기고 헤어지고 싶어."

"그래? 아 참, 긴이가 전해 달라는 말이 있어. 앞으로 잘 살래. 그리고 만약 이게 영원한

이별이라면 영원히 잘 살라고. 아마 러시아의 시인이 한 말이지?"

희뿌연 연기를 토하몉서 열차가 달려오고 있었다.

"온다." 마사오가 말했다.

"정말 오는데. 웬일로 오늘은 연착도 안 하지? 얄미운데."

미찌꼬가 마사오 앞에 우뚝 서더니 서둘러 말을 했다.

"너한텐 내가 연인이 아니겠지만, 넌 그때부터 지금까지 나의 연인이야."

마사오는 당황했다. 무슨 말이든 해야 했다.

"아니야 나도 그랬어. 하루도 그 일을 잊은 적이 없었어."

"자, 키스해. 이건 이별의 키스야."

가지고 있었던 가방을 내려놓고 두 손으로 마사오의 목을 감았다. 멀찌감치 사람들이 서

있었다. 미찌꼬의 얼굴이 바싹 다가왔다.

자기의 처음을 주고 떠나는 소녀의 마지막 바람이었다. 마사오는 미찌꼬의 어깨를 감싸안

고 입술을 댔다. 격렬한 키스였다. 어른들과 같은 대담한 행위였다. 그러나 곧 십대인 것을

알 수 있었다. 선생님들이 본다면 마사오는 당장 퇴학이었다. 입술을 먼저 뗀 것은 미띠꼬

였다. 마사오는 안심했다.

"네가 나쁜 사람이었다면 난 이럴 용기가 없었을 거야. 기뻐. 이젠 정말로 미련이 없어."

미찌꼬가 맑은 눈으로 말했다. 마사오는 미찌꼬의 가방을 들었다. 주위는 둘러보지 않는

편이 좋았다.

"너에게 준 선물이라고 생각한다면 당연할 거야."

"어머. 그럼 난 너무 커다란 선물을 받았어. 난 그 차가운 시냇물도 잊지 못할 거야."

열차가 홈으로 들어섰다. 요란하게 숨을 토하면서 정지했다. 두 사람은 악수를 했다. 말은

없었다. 서로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놓았다. 미찌꼬는 맨 나중에 탔다. 그리곤 열차 문 앞

발판에 섰다.

"안으로 들어가."

"떨어질까 봐 그래? 여기도 좋아."

열차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사오는 열차를 따라 걸었다. 열차의 속도는 점점 빨

라졌다. 마사오의 걸음도 뜀박질로 변해 있었다. 마사오가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빨라졌을

때 마사오는 가쁜 숨을 토하며 제자리에 섰다.

미찌꼬는 한 손으로 손잡이를 잡고, 다른 한 손은 마사오를 향해 세차게 흔들기 시작했다.

마사오도 손을 흔들었다. 미찌꼬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흔들리고 있는 손만 하얗게 보였

다. 그리곤 마침내 손도 보이지 않았다. 기차는 멀리 작은 점이 되어 가고 있었다. 푸른 아

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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