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수라기(獸羅記) 47번째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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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소녀는 호화사를 선정하지 않겠습니다.”
쿵..
무언가 모를 기묘한 감정에 중인들은 일제히 입을 다물고 침묵을 지켰다. 낯설음이라 할까? 어색함이랄까? 당연히 벌어져야 할 일이 전혀 뜻밖의 방향으로 흐름에 당황한 군중들은 일순 어찌할 바를 몰랐다.
군웅들은 멍하니 유가형을 쳐다 보고 있었고 고개를 곳곳이 세우고 또박 또박 말하던 유가형의 머리는 어느새 조금씩 숙여져 이제 그 눈길을 아래로 하고는 땅바닥만 쳐다 보고 있었다. 사람들의 시선의 무게가 무거운지 하이얀 얼굴색이 더욱 창백하게 변해져 있었다. 기실 누구보다 당황하고 놀라운 것은 남궁비였을텐데 오히려 그는 얼굴색이 한번 변했을뿐 그리 크게 놀란 기색이 아니었더. 허나, 은유한 그의 눈빛은 강한 섬광을 지속적으로 뿌려내며 유가형을 빤히 바라 보고 있었다. 오히려 옆의 황보두균이나 수가위가 훨씬 경악하고 있었다.
곧 사람들이 정신이 돌아오고 예의 그 웅성거림이 들려 왔다.
“호화사를 선정하지 않는다니..?”
“남궁공자와 무슨 일이 있나?”
“그럼 남궁소협은 어찌 되는 거지?”
“난화성녀가 왜..?”
사람들은 이런 저런 상황을 만들어 내며 입방아를 찧기 시작하였다. 그러면서 말의 흐름이 점점 비약적으로 변해가는 듯 싶자 얼른 제갈 수란이 나서서 그 허리를 끊었다.
“유언니는 호화사를 선정하지 않는다 했어요. 그럼 다음에는 제가 호화사를 선정하지요. 전 호화사로 만검창룡 남궁소협을 선정하겠어요. 남궁소협, 제 호화사를 맡아 주시겠어요?”
“기꺼이..”
빙긋 웃으며 그 심유한 지혜가 가득한 눈으로 남궁비를 바라보며 제갈수란은 호화사를 청했다. 그리고 남궁비의 허락이 떨어지자 사람들의 환호성이 뒤를 이었다.
“호화사! 남궁비! 남궁비!”
“남궁비! 우와!”
그제서야 다른 이들의 기대에 부응하는지 군웅들의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사람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계속해서 악서령과 석영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악서령과 석영은 나름대로 혼담이 오고가던 사람이 있었다. 화산의 목영근이나 당문의 당철의가 그들이었다. 허나 이 자리에 보이지 않음에 사람들은 무언가 이어질 또다른 어긋남을 기대하는지 환호를 차차 가라앉히고 사화 중의 천향매화와 혈장미의 입을 빤히 응시하였다.
사람들의 눈길이 자신에게 향함을 느끼자 두 여인이 별 고민 없이 바로 입을 열었다.
“소녀 석영은 주환 소협을 호화사로 선정합니다.”
“소녀 악서령은 주환 소협을 호화사로 선정합니다.”
마치 한명이 말하듯 동시에 터져나온 말..자신의 이름만 틀렸지 토시하나 틀리지 않고 똑 같은 문장이 사화 중의 두 여인의 아름다운 입에서 새어나왔다. 사전에 서로 입을 맞춘 것처럼 한 목소리로 내뱉어진 말. 허나 사람들은 그 둘의 동시에 말한 것보다는 ‘주환’이라는 이름에 깜짝 놀랐다.
“주환? 주환이 누구지?”
“그런 사람도 있었나?”
“신진 고수인가?”
“세가의 사람들은 아닌 것 같은데..”
“주환이라는 자가 누구시오?”
두 여자를 빤히 응시하던 사람들은 웅성거리며 서로간에 정보를 교환하며 수군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사화가 무림에 끼치는 영향이 지대하고 사화 중의 한명과 어떠한 관계를 가진 다는 것은 무림의 판세를 바꿀 수도 있는 것이기에 더욱 그러하였다. 실제로 난화성녀와 남궁세가의 정혼이나 혈장미와 당철의의 혼담등에 여타 제반 강호의 문파들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남궁비와 난화성녀의 혼례로 인한 두 세력, 결코 만만하다고 할 수 없는 두 문파의 결속은 힘의 균형을 자연스레 한쪽으로 기울게 할 수 있음이 충분하였기 때문이었다. 이와 조금 다른 의미로 사천당가는 혈장미 석영과의 혼담을 주선한 것이 혈장미 석영의 배경인 천외삼기의 후광을 얻기 위함이 강했다. 정파의 세력이라고는 하지만 그 태생의 한계, 즉 용독과 암기라는 외도쪽의 기공으로 명성을 얻은 사천 당가는 타 문파에 알게 모르게 배척을 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에 천외삼기라는 전대의 거성을 끌어들여 보다 양지로 진출하려는 계획이 있음을 많은 무림 세인들은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특별히 막을 명분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에 비해 악서령이야 같은 화산 내의 관계라 별다른 말이 없었지만…
중인들의 놀람은 계속 되어지고 주환이란 사람에 대한 호기심과 의혹이 점차 증폭이 되어갔다. 그 중 성질이 급한 몇몇은 여인들에게 주환이 누구냐고 뒤에서 외치기까지 하였다.
그러자 천향매화와 혈장미의 별빛같이 빛나는 눈동자가 한 곳을 향하였다. 그 눈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사람들의 시선이 옮겨갔다. 그 끝엔 거대한 체구의 사내, 아환이 예의 그 시커먼 묵도를 등에 메고 무심한 얼굴로 장내를 쳐다 보고 있었다.
주위의 사람들은 처음 아환이 이 곳에 서서 사화지연을 쳐다 볼 때 왠 덩치만 큰 그냥 이름모를 외가무사가 사화의 명성을 흠모하여 구경이나 하려 온자 인줄만 알았다. 허나 세인들의 시선이 아환에게 모이자 반신반의 하면서 아환을 쳐다 보았다.
비단 주위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남궁비를 비롯, 패왕권이나 곤륜제일룡 그리고 천궁의 여인까지 형형히 안광을 빛내며 아환을 쳐다 보았다. 그들의 눈에 담겨진 내용은 가지각색이었다. 의아함, 호기심, 어이없음, 질투, 당혹함, 흥미, 부러움 등등..
“내가 주환이오.”
두툼한 입술이 열리고 구리빛으로 잘 그을려진 피부를 가진 장대한 거한이 입을 열었다. 그래도 많은 이들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빤히 아환을 쳐다 보았다. 어찌 이런 외가무사 나부랭이가 호화사가 될 수 있는가?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런 어색한 장내를 정리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제갈수란이었다.
“주소협. 이리 나오세요. 이쪽 원탁으로 앉으시지요.”
제갈수란이 자리에서 일어나 교수를 들어 자리 하나를 손으로 가리켰다. 그 자리는 비어 있는 자리이며 자신의 옆자리이기도 하였다. 제갈수란의 말이 끝나고 아환이 성큼성큼 큰 보폭을 옮겨 모임의 중심쪽으로 나아갔다. 바다가 갈라지듯 좌우로 물러서는 중인들..자신도 모를 위압감에 길을 터주고 넓은 주환의 등을 각양각색의 의미가 담긴 눈으로 응시하였다.
몇걸음 되지 않아 원탁에 도착한 아환은 손을 들어 포권의 예를 원탁의 다른 사람들에게 취했다.
“주환이라 하오.”
워낙 큰 체구인지라 금새 앞이 꽉 막혀 있는 느낌이 들은 것은 원탁에 앉아 이쓴 사람들의 공통의 생각이었다. 아환의 예에 여인들은 가벼운 목례를 그리고 남자들은 마주 포권을 해보였다.
“남궁비라 하오.”
“곤륜의 수가위오.”
단지 하나. 패왕권 황보두균은 아환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기만 할뿐 아환의 포권에 마주 답을 하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아환의 출현으로 인하여 장내는 술렁이기 시작하였다. 선라봉의 중턱에 모인 자들은 물령 오십을 넘어 꽤 무리지어 보였지만 누구하나 아환을 전에 알고 있던 이가 없었기에 수군거리며 의견을 나누고 아환의 정체를 파악하려 하였다. 처음에는 작은 소란이 점점 확대되고 웅성거림이 커지자 연회의 주최자인 남궁비가 나섰다.
“주형은 어디 출신이시오?”
“특별히 어디 출신이라 할 것도 없소. 어려서 여기저기를 떠돌아 다니다 보니..”
“사문(師門)이 어디시오?”
“꼭 밝혀야 하오?”
“그건 아니지만..허험..”
“그럼 말하지 않겠소.”
아환의 거절에 순간적으로 당황한 남궁비, 그보다 주변의 인물들이 더 놀라움을 보였다. 감히 칠룡의 수좌의 물음에 답을 하지 않다니..개중 몇몇 칠룡의 이름에 질시와 시기를 하는 자들은 통쾌함이 엿보였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의 안색에 떠오른 것은 노기(怒氣)였다.
“어디서 별 개뼉다귀 같은게 굴러와서는..”
굵은 음성, 이죽거리는 어투가 아환의 귓가에 들려왔다. 아환이 굳이 눈을 돌리지 않아도 그가 황보두균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칠룡과 사화를 비롯 무림의 명성을 날리는 후지기수가 참여하는 자리에 듣도 보도 못한 인물이 호화사로 나타남에 심사가 튀틀린 모양새가 역력하였다.
아환의 그 말을 귓가로 흘려 듣고는 한 자리에 털썩 주저 앉았다. 그의 앉은 자리는 제갈수란과 황보두균의 가운데 즈음 사이에 빈 의자를 각각 하나씩 둔 자리였다. 정면으로 보이는 상대는 천궁의 은아려라는 여인.
황보두균은 자신이 무시당했다는 생각이 들자 얼굴이 붉어지며 막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려고 할 때 남궁비의 담담한 음성이 들려왔다.
“악소저, 석소저, 두분 소저들께서는 주형을 호화사로 선정하셨소이다. 그렇다면 두 분께서는 주형을 보증하신다는 말씀이십니까?”
“보증합니다.”
“…예.”
석영의 당돌한, 확신에 차있는 대답과는 달리 악서령은 작은 목소리로 대답을 할 뿐이었다. 이미 석영의 뇌리 속에는 아환이라는 존재의 절대감이 확연히 자리 잡고 있는 상태였지만 악서령은 아환에 대한 감정은 공포와 복종일 뿐이었다. 그외에는 아환에 대하여 알고 있는게 전무하다시피 한 악서령이었다.
“그렇게 두분 소저가 보증하시는 주형께서는 호화사로 선정됨에 아무 하자가 없습니다. 사화지연의 호화사는 소생 남궁비와 주환, 주형 두분이 맡겠소이다.”
여태까지 일어난 적이 없었던 일이 일어났다. 몇번 되지 않은 사화지연이지만 두 여인이 한명을 동시에 호화사로 정한 적이 이번이 처음이었다. 또한 유가형이 호화사를 선정하지 않은 것도 기이한 일이었고 제갈수란이 남궁비를 호화사로 정한 것도 뜻밖의 사건이었다. 무엇보다 전혀 그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주환이라는 인물자체가 중인들에게는 충격으로 다가 왔다.
“소생은 그 호화사를 인정할 수 없소이다.”
붉 같은 음성이 들려 왔다. 황보두균이었다.
“소생은 이번 사화지연의 호화사를 인정 못하오이다.”
“무슨 뜻이오? 황보형?”
“말 그대로요.”
“황보형은 소생 남궁비를 부정하는 것이요?”
“그것이 아닌 것은 남궁형도 잘 알지 않소?”
“그렇다면 황보형은 사화지연의 관례를 인정하지 못한다는 말이오?”
지금까지 사화지연의 관례는 사화가 선정하고 보증하는 자가 호화사로 정해짐에 누구 하나 불평을 하지 않았었다. 대부분 칠룡의 인물이 선정되었지만 혼담이 없는 제갈수란이 두어번 다른 인물을 호화사로 정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제갈수란이 선정한 호화사도 나름대로 혁혁한 명성을 날리는 인물이었기에 사람들은 사화가 선정한 호화사에 아무런 불만을 갖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번 황보두균이 그런 관례에 제동을 건 것이었다.
“관례? 어디서 굴러 먹다온지도 모르는 것한테 무슨 관례요?”
“황보형, 말씀이 지나치시오.”
“하나도 지나치지 않소.”
보다 못한 수가위가 황보두균을 말려도 황보두균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단지 노골적인 적대감을 아환에게 보내고 있을 뿐. 그 바탕에는 자신 보다 못한 인물이 호화사로 선정된 것에 대한 불만과 남궁비에 대한 견제심이 작용을 한 것이리라.
“남궁형. 소생이 뭐 하나 물어 봐도 되겠소?”
묵묵히 자리에 앉아 있던 아환이 남궁비에게 질문을 던졌다.
“말씀하시오. 주형.”
“오늘 연회가 칠룡지연이오?”
짧은 질문. 그러나 그 속에 담겨 있는 내용은 결코 작은 게 아니었다. 그 의미는 지금 이 자리는 사화가 주체적인 자리이고 사화를 위한 자리이니 호화사로 끼지 못한 놈은 알아서 기라는 뜻이었다.
“물론 아니오. 그것 참..”
남궁비도 어이가 없어 그 준미한 얼굴로 아환을 빤히 쳐다 보며 할말을 잃었다. 그때였다.
“이 개뼉다귀 같은 놈! 감히 네 놈이 칠룡을 능멸하려 드느냐?”
시뻘개진 얼굴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황보두균이 아환을 노려보며 외쳤다. 두 주먹을 불끈 쥔채 금방이라도 출수할 듯 부들부들 떨고 있는 황보두균, 시퍼런 안광이 줄기줄기 눈에서 뻗어 나왔다.
“황보형! 무슨 짓이오. 즐거워야 할 연회에 어서 노기를 가라 앉히고 자리에 앉으시오.”
남궁비가 황보두균을 향해 준엄한 말로 자리에 앉을 것을 권하였다. 그런대도 막무가내, 황보두균은 아환을 향해 분노를 폭발시켰다.
“네 이놈! 네가 사내라면 이리 나와 나와 한번 손을 나눠 보자! 네 오늘 네놈의 실력이 어디 그 혓바닥처럼 대단한지 한번 보리라.”
아환이 눈을 돌려 황보두균을 정시하다 스르르 자리에서 일어났다.
둘 사이의 거리는 불과 반장여거리..황보두균의 체격도 무시 못할 거한인데 아환의 앞에 서니 반뼘 정도가 작아 위축되어 보였다.
“뭐 어쩌자는 거요?”
“이 놈! 이 놈이..”
위압적인 아환의 태도에 순간적으로 눌렸다 싶은지 황보두균의 얼굴이 더욱 붉어진채 말을 채 잇지 못하고 거센 기운을 코로 뿜어 대었다.
“에잇!”
휘잉..
바람을 세차게 가르는 소리가 들리며 황보두균의 주먹이 아환의 얼굴을 향해 날아왔다.
‘건곤(乾坤)의 화(化)’
아환이 슬쩍 고개를 뒤로 젖히며 손바닥으로 주먹의 등을 가볍게 쳤다. 그러자 황보두균은 빗나간 주먹에 오히려 경력이 가해지면서 급격히 중심을 잃어버리고 비틀거리며 앞으로 신형을 기울였다.
“으읏..”
이젠 분노에 수치감까지 더해졌다. 황보두균은 급기야 두 손에 진기를 운용하며 크게 한걸음 땅을 딛고 주먹을 내질렀다.
쾅!
진각(振脚)! 땅이 울림과 함께 세차고 빠르게 정권이 뻗어왔다. 천왕출현의 초식, 황보세가의 독문절학인 천왕권의 일초였다.
어느 새 아환도 원탁에서 조금 떨어져 나와 자세를 잡고 황보두균의 주먹을 맞이 하였다. 아환은 천왕권의 일초를 흘리듯 가볍게 몸을 뒤로 빼내어 피하였다. 이어지는 천왕개산, 두 팔을 앞으로 뻗어 정권을 질렀다. 그리고는 양쪽으로 두팔을 찢어 내듯 쳐나갔다.
아환 역시 경시하지 못하고 보결을 밟으며 옆으로 돌아 나갔다. 그러면서 가볍게 주먹을 말아쥐고 양팔의 가운데로 쭉 뻗어 내었다. 풍영섬! 풍도십팔식의 제일초. 빠르게 내지르는 주먹이었다.
“으헛!”
아환이 피하나 싶더니 그 사이로 뚫고 들어오는 주먹에 황보두균은 헛바람을 들이 쉬며 뒤로 물러서서 천황봉폐의 수법으로 양팔을 교차시켜 방어를 하였다. 사이에 들어온 육권이나 권각을 부러뜨리는 중수법. 아환은 유유히 팔을 빼내고는 별다른 초식이 아닌 뒤돌려차기로 발을 쭉 뒤로 내뻗었다.
퍽!
“우욱..”
양팔을 교차시키며 방어를 하던 차라 미처 두 팔을 제어하지 못하였고 또 그 팔에 시선이 가린지라 황보두균이 그 기세를 느꼈을때에는 이미 발의 날이 가슴어림부근이었다. 아환이 내공을 주입하지 않은 순수한 근력으로만 쳐낸 발차기 였지만 방어태세가 갖추어 지지 않은 황보두균인지라 입은 충격이 대단하여 몇걸음 뒤로 물러나 신음을 흘렸다.
원래 발차기는 발끝이나 옆날 등의 접점을 최소화하여 충격을 집중시키는게 일반적이지만 아환은 날을 세우다 발을 틀어 발바닥으로 황보두균의 가슴을 쳤다. 그 결과 황보두균의 흉부에 발자국이 하나 남았다. 어제 저녁에 내린 비로 인하여 땅이 아직 젖은 상태라 그 자국은 아주 뚜렷하였다.
뒤로 주춤 밀려난 황보두균은 가슴을 부여 잡으며 다시금 자세를 바로 하였다. 그리 심한 내상을 입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문득 시선이 맞은 자국으로 향한 황보두균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치욕! 바로 그것이었다.
주위를 둘러 싸고 있는 남궁비를 비롯 사화나 천궁의 여자나 다른 이들은 전혀 이 싸움을 말릴 생각을 하지 않고 숨소리 조차 죽여가며 둘의 대결을 지켜 보았다. 그 둘을 바라 보는 의미야 제각각이겠지만 어쨌든 세인들은 황보두균이 뒤로 물러나 자세를 다시 잡을때까지 일련의 과정을 빠짐없이 지켜 보았다.
대부분의 중원 무인들이 그러하듯 이들 역시 밥보다 싸움구경을 좋아하는 것이 보편적인지라 집중을 하여 대결을 지켜 보았다. 그들 중에는 둘의 무공의 대결외에 주환의 정체와 칠룡에 속한 황보두균의 무위를 견식한다는 기대감이 상당했었다. 그러나 몇합의 손속이 나누어지고 황보두균이 뒤로 물러서자 이곳 저곳에서 놀람에 탄성이 터져 나왔다.
“우와.!!!”
“칠룡의 하나를 뒤로 물러서게 하다니…”
“새로운 신진 고수의 출현이다!”
“황보두균이 무릎을 꿇는가?”
군웅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비수처럼 황보두균의 가슴을 후벼 파내었다. 조금전까지 자신을 칭송하며 어찌하면 지신에게 말을 한마디 더 붙일까 하던 중인들이었다. 그런 인간들이 자신이 조금 약세를 보였다 하여 저런 말을 지껄이다니..분노는 이내 그 방향을 틀어 아환에게 향했다.
“네..놈! 과연 한가닥하는 수가 있었구나. 더 이상 손에 사정을 두지 않겠다.”
황보두균의 눈이 착 가라앉았다. 황보두균 역시 그 이름을 거저 얻은 것만은 아니라는 것이 여실히 드러났다. 마음을 가다듬고 내기를 서서히 끌어 올렸다. 꽉 움켜쥐었던 두 주먹이 약간 느슨히 풀리는 가 싶더니 가볍게 주먹을 말아쥐고는 가슴어림으로 손을 끌어 올렸다.
“천황출현!”
세차게 한마디 외치면서 크게 일보를 내딛고 정권을 쭉 뻗었다. 조금전과 똑 같은 초식, 그러나 전혀 달랐다. 그속에 내포된 경력이 틀렸고 기세가 틀렸다. 일보를 내듣는다 싶더니 어느새 일장여의 거리를 좁히고 황보두균의 커다란 권영이 아환에게 밀려왔다.
아환의 발이 기이한 방위를 밟으며 태극의 문양을 그리듯 몸이 둥글게 회전을 하였다. 태극신보, 비왕으로부터 구결만 전해들은 상태에서 끊임없는 노력으로 그 보결을 깨우친 아환의 신형이 유유하게 권영을 흩뜨리며 원을 그렸다.
“터엇!”
황보두균은 정권을 회수함과 동시에 앞의 진각을 떨친 발을 축으로 순간적으로 천왕각을 떨쳐내었다. 천왕철각! 내기를 다리 전체에 집중시켜 마치 쇠몽둥이 같이 만들어 적을 공격하는 수법. 아환은 거센 기세에 감히 방심하지 못하고 두 손을 교차하여 황보두균을 퉁겨내었다.
“천왕패!”
튕겨 올라간 발의 탄력으로 황보두균이 중심을 잡고 있던 발을 치켜 들며 크게 회전을 그리며 파각으로 아환의 머리 부분을 내려 찍었다. 아환은 슬쩍 몸을 틀어 뒤꿈치를 피하고는 빠른 보법을 이용하여 황보두균의 옆으로 돌아간 후 팔꿈치로 황보두균의 가슴부위를 연달아 쳐대었다.
팍..팍..팍..팍..
정신없이 뒤로 물러서는 황보두균, 두 손을 가슴에 대어 손바닥으로 연이은 아환의 팔꿈치 공격을 막았으나 그 경력에 대항하지 못하고 연신 뒷걸음질 쳤다. 순식간에 십여합의 손을 나눈 상태, 상황은 명백히 아환의 우세였다.
“노오옴!”
황보두균이 이를 악물고 다시금 자세를 바로 해서 짓쳐들어갈려고 하는 순간 그를 뒤에서 잡는 손길이 있었다.
“황보형, 진정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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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회에는 ‘응응응’이 없네요..다음회에는 나오지 않을까..싶네요.
스토리가 조금 늘어지는 감이 없잖아 있지만..양해하시리라 믿습니다.

하루 하루가 바쁘게 지나갑니다. 어찌 살고 있는지 도통 모를때도 많아요.
모두들 더운 여름 씩씩하시길..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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