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라는 이름만으로....// 아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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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튜브링크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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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부터 거세게 몰아치는 비는 그칠 줄을 모르고 계속 쏟아지고 있었다.
마치 대지를 온통 적시고 나서, 끝내는 모든 것을 쓸어 버릴 듯이 그렇게 비가 내리고 있었다.
영훈은 과음과 수면 부족으로 인한 숙취를 채 떨어버리지도 못한 채, 등교를 서두르고 있었다.
오전 8시 첫 강의는 1학년 때 빵구를 낸 교양 영어 시간이었다.
졸업을 위해서는 반드시 학점을 이수해야 하는 과목이므로, 졸업반이 되었지만, 어쩔 수 없이 수강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책 가방을 정리하면서, 지갑을 확인한 그는 긴 한숨을 내쉬지 않을 수 없었다.
낡아서 귀퉁이가 닳아버린 그의 반 지갑에는 달랑 천원짜리 2장만이 남아있었다.
월초에 고향에서 올라온 생활비는 이제 겨우 2주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남은 돈은 그게 전부였다.
워낙 빠듯하게 올라온 돈이었고, 그나마 그는 제대로 계획적으로 쓰지 못하고, 몇몇 친구들과 몇 번의 술로 다 써버리고 만 것이었다.
남은 반달의 생활이 그에게는 부담스러운 나날이 될 것이지만, 이미 익숙해져 버린 그런 생활에 그는 큰 걱정은 없었다. 단지, 불편할 뿐이었다.
자취방을 나서면서, 툇마루 밑에 쳐박혀 있던 살이 부러진 낡은 우산을 찾아 펼치면서 몸 하나도 제대로 가리지 못하는 우산을 낮게 바쳐 들며, 가방을 옆구리에 껴들고 잰 걸음으로 대문을 나선다.
대문 소리가 나자 안방 방문이 빠꿈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주인 아주머니였다.
낡은 우산 탓도 있지만, 워낙 거센 비에 얼마 걷지도 않아서 이미 바지춤은 물에 빤 듯이 흠뻑 젖어 들고 말았다.
과음 탓에 욕지기가 올라오는 것을 느끼며, 크게 가래침을 만들어 거센 비에 정신없이 농탕질을 당하는 길거리에 거침없이 뱉어내며 강의 시간에 대기위해 조금씩 걸음을 빨리 한다.
영훈이 2학년을 마치고 군대를 갖다 와서 다시 복학을 했을 때, 그가 가장 어색해 했던 것은 몇 년 사이에 크게 변한 학교의 분위기였다.
그가 2년의 생활을 했을 때의 학교는, 그를 비롯해서 그와 흡사한 고리타분한 남학생이 대부분이었고, 여학생은 그저 간호대나 사대정도에서만, 눈에 띄였던 것 같은데, 그 몇 년 사이에 학교에는 화사하고 제법 미태가 나는 여학생들이 많이 늘어났던 것이다.
사대에 미술 교육학과하고 음악 교육학과가 새로 생긴 탓에 많은 여학생이 이 남자들만이 득실거리던 교정을 이토록 화사하게 바꾸어 놓은 것이다.
괜시리 비실거리며 흘러나오는 웃음을 지으며, 걸음을 재촉한다.
이른 1교시 수업이었지만, 교양 과목인 관계로 많은 여학생들이 있었고, 지금 그는 강의실 전체에 가득한 분냄새가 마냥 좋기만 한 것이었다.
‘오래 살고 볼일이야...’
그는 그 몇 년 사이의 이런 많은 변화가 여간 신통하고 재미있는 게 아니었다.
강의실 맨 뒷줄에 앉은 그는 출석을 부르고, 강의가 진행되는 동안 평소와 다름없이 천천히 강의실 전체를 흝어 본다.
아무리 보아도, 큰 변화임에 틀림이 없었다.
다음 시간은 lab실에서 listening으로 진행된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수업이 끝나고, 다음 강의까지 남은 시간동안 모자란 잠을 청할 생각으로 어슬렁거리며 빈 강의실을 찾는 그에게 동기인 호선이가 다가오며 말을 건넨다.
“어제도 술을 좀 했구나...”
“응... 날도 덥고 해서 막걸리 한잔 했지...”
“언제는 이유가 없었냐?... 하하하...”
괜스레 짜증이 나는 웃음이었지만, 그는 그냥 지나치며 가벼운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한다.
301호.
교양관 강의실 중에서 가장 큰 방으로 보통 때는 수업이 없어, 자습을 하거나 쉬는 학생들이 많이 찾는 강의실이다.
영훈이 뒷문을 열고 들어서자 넓은 강의실에 혼자 있던 남학생이 뒤를 한번 돌아보고는 이내 펼쳐놓은 책으로 시선을 떨군다.
영훈은 문쪽에서 가장 가까운 자리를 잡고서는 커다란 영영 사전을 꺼내 그것을 베개 삼아 잠을 청하지만, 숙취와 두통으로 연신 작은 신음만이 나올 뿐 쉽게 잠이 오질 않는다.
얼마를 그렇게 뒤척이다 잠이 들었었나?
강의실이 소란스러워 잠을 깨보니, 수업이 있는 지 학생들이 꾸역 꾸역 모여들고 있었다.
그것도 잠이라고, 두통도 이른 아침보다는 훨씬 견딜 만해졌다.
문득, 그는 어제 점심때 라면 한 그릇 먹은 이후로 끼니라고는 아무것도 먹지 않은 게 생각이 나자, 더 많은 허기가 엄습해 오는 듯 했다.
그새 엄청나게 쏟아 붓던 폭우도 그치고, 해가 중천을 향해 가고 있었다. 문득 문득 나타나는 장마철의 해는 더욱 강렬한 느낌이 들었다.
화장실로 가 물을 몇 모금 마시고, 머리를 다시 묶고 나서 다음 강의를 빼먹고 학교 앞 분식집으로 향하면서, 가방을 뒤적거려 작년에 회사에 취직한 진웅이가 ‘요긴하게 써먹어라’ 라는 말과 함께 건내준 casio 전자 계산기를 꺼내 들었다.
지하 보도로 길을 건너 분식집이 있는 골목 초입에 있는 3층짜리 낡은 건물로 향했다.
학생들도 마구잡이로 남발하는 카드가 유행하고 나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전당포였다.
노랭이 영감과 한참동안의 실랑이 후에 만 오천원을 손에 쥐고는 터덜터덜 분식집으로 향했다.
라면에 밥 한 공기를 말아 먹어도 도통 포만감이 없다.
“아줌마... 밥이 왜이리 적어요?”
별 시덥지 않은 투정이었다.
아줌마는 익숙한 표정으로 반공기의 밥을 더 건네주며, ‘이게 수백 그릇이네’ 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밥을 먹고 분식집을 나서자, 문득 다시 학교에 가고 싶은 마음이 나질 않았다. 비록 수업은 두 강의가 더 있었지만 영 발걸음이 내키지 않았던 것이다.
딱히 갈 곳도 없이, 터덜거리며 걷던 그에게 문득 어제 밤 같이 술을 마신 병찬이가 오늘 오후 2시에 '종로에서 미팅을 잊지 않았지?' 라고 얘기를 했던 게 생각이 났다.
아마도 일전에 오가며 얘기를 했던 모양이었다. 술김에 '당연히 가야지...' 라며 호기를 부렸던게 생각이 나자, 아차 싶은 생각이 들었다.
길 건너에서도 보이는 교정의 시계탑을 보니, 이미 1시 40분을 넘어서고 있었다.
아무리 형편이 닿지 않는다 해도 친구와의 약속을 일방적으로 어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다시 길을 건너, 서둘러 종로행 버스에 올라타고 나서야 아침에 일어나서 양치질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
‘제기럴...’
차창을 거울 삼아, 얼굴을 쓸어 내리며 피곤한 몸을 의자 깊숙이 실으며 중얼거린 말이었다.
점심 시간 무렵이라 거리에 차들이 별로 없어, 2시가 조금 지나서 약속한 커피 샾에 도착할 수 있게 된 것은 다행이었다.
지하의 커피 샾 문을 젖히고 들어가자, 멀지 않은 곳에 병찬이와 몇몇의 친구가 눈에 띈다.
“거의 제 시간에 왔네”
병찬이는 영훈이가 술을 과음한 데다가, 누가 깨워주지도 않는 처지임을 잘 알고 있었기에, 혹시나 하는 염려를 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응... 점심도 먹고 왔다.”
자리에 앉으면서, 같이 앉아 있는 녀석들을 돌아보자, 모두들 별로 반갑지 않은 표정들로 그를 쳐다본다. 아마도 초췌한 모습의 영훈이가 미팅의 밝은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을 거라는 염려들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염려들 마라... 난 땜빵아니냐!”
괜스레 기분이 좋지않아, 투정아닌 투정을 부린다는 것이 병찬이가 들으면 미안하고 기분 나빠할 말이 터져 나오고 말았다.
“땜빵이라니... 아냐 임마. 니가 오늘의 진짜 주인공이야...”
빈말인줄 알지만, 귀에 대고 빠르게 주절대는 병찬이의 귀여운 얼굴이 오늘따라 더욱 앳되고 상큼해 보였다.
“그래 알았다.”
그렇게 몇 마디 나주지도 않아, 문이 열리며 한 떼거리의 여자들이 몰려 들어온다. 대충 숫자를 보니, 그들과 미팅을 하기로 한 여자 애들이라는 것을 알았다.
맨 앞으로 들어오던 자그마한 체구의 여자애가 병찬이를 보고 손을 들어 인사를 건네고는, 같이 온 애들을 영훈이 앉아 있는 테이블로 인도한다.
영훈은 본능적으로 자세가 반듯해 지는 것을 느끼며, 면면을 살펴 보니, 모두 인상이 깨끗하고 단정해 보였다.
소지품을 꺼내 각기 짝을 맞추는 순간에 병찬이가 자기 여자 친구에게 뭐라 귀엣말을 하는 것이 보였고, 이내 그 여자 애는 바로 옆에 앉아 있던 여자 애에게 뭐라 귀엣말을 하는 것이 보였다.
멀찌기 있어서 뭐라 하는 지는 전혀 들리지 刻年쨉? 그 여자 애가 팔을 뻗어 영훈이가 내놓은 네잎 클로버가 들어가 있는 열쇠 고리를 집어 든다.
다시 한번 얼굴을 살펴 보니, 제법 미모가 있는 여자 애였다.
갑자기 병찬이가 아까 귀엣말로 중얼거린 얘기가 떠올랐다.
‘정말인가?...’
여하튼 졸지에 미팅에 참석한 영훈은 그렇게 해서, 참으로 오랜만에 여자를 만나는 기회를 다시 갖게 된 것이었다.
문득, 그가 군에 있을 때까지 그를 기다리던 미정이가 떠올랐다.
그와 캠퍼스 커플이었던, 미정이는 그가 군대에 가있는 동안에, 졸업을 하고, 지금은 외국인 은행에서 fund manager 로 일을 하고 있는 그의 첫 사랑이었다.
둘은 너무도 깊이 사랑했지만, 미정이의 집에서 그의 집안 배경따위를 시비걸어 둘의 교제를 금지했고, 결국은 이렇게 둘을 갈라 놓고 만 것이었다.
미정이는 마지막 순간까지 영훈을 사랑한다고 했다.
“비록, 세상이 우리를 시기해 이토록 사랑하는 우릴, 이렇게 처참하게 갈라 놓는다 해도 난 너만을 사랑했고, 너만을 사랑할 거야...”
라는 말을 되내이며, 한 없는 눈물을 흘리고, 그렇게 남겨진 미정이었다.
‘씨팔...’
잊혀졌다고, 잊을 수 있다고, 아니 잊어야 한다고 수도 없이 생각하고 쇄뇌했건만 다 부질없는 노릇이었다.
‘씨팔...’
“네?”
영롱한 목소리가 영훈의 귓가에 울려 퍼지는 순간, 그는 파트너 여자가 자기 앞에 앉아 있다는 것을 인식했고, 그녀 앞에서 욕지거리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다른 생각을 좀 하고 있었어요... 정말 죄송합니다...”
“아니요. 괜찮아요. 저도 가끔 그래요. 차 안에서 공상을 하다가 집을 지나친 적이 한 두번이 아니거든요... 호호...”
웃음이 화사한 여자 애였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에게 미안해 하고, 그걸 이해하고 하면서 이야기를 해 나아갔다.
그녀는 병찬이 여자 친구 애와 같은 학교를 다니는 애가 아니었다. 단지 병찬이 여자 친구 애의 고등학교 동창으로, 대학은 다르지만 같은 연합 서클에 있던 애였다.
그리고, 병찬이 여자 친구 애가 재수를 하고 지금 4학년인 반면, 그녀는 금년 초에 졸업을 하고 금오 그룹 회장 비서실에 근무하고 있는 직장인이었다.
이름이, 은하라고 했다.
“성은 심씨 아니예요? 성까지 심씨면,사람들이 정말 뭔 영화배우 심은하인 줄 착각하겠어요...”
영훈의 객적은 소리에 기분이 유쾌한 지 그녀는 고개까지 뒤로 젖혀 가며 크게 웃어 보인다.
둘은 그렇게 서로에게 조금씩 조금씩 다가 가고 있었다.
“키가 얼마나 되세요?”
“네... 183입니다. 은하씨는 요?”
“전, 172예요. 너무 커서 볼품이 없지요?”
“아니요, 천만에요... 아주 보기 좋아요. 그야말로 ‘정말 자알 빠지셨습니다’... 하하하...”
그렇게 얘기를 나누는 사이, 영훈은 여자 친구와 나가면서 손을 들어 흔들어 보이며 윙크를 하는 병찬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사실은 제 친구하고 병찬씨에게서 영훈씨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순간 영훈은 병찬의 윙크와 그녀의 고백 아닌 고백으로 앞뒤 전후 사정을 대충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저... 우리 나가지요. 사실은 제가 비가 오는 날에는 술을 마시지 않으면 몸이 많이 아프거든요...”
깔끔하게 성장을 한 친구 놈들도 그렇고, 시끌시끌한 카페의 분위기도 그렇고, 영훈은 그 곳이 영 자기에게 어울리지 않는 곳이라는 생각에 서둘러 일행과 떨어져 그녀와 먼저 나와버리고 말았다.
“대낮인데, 괜찮겠어요?”
“대낮인건 괜찮은데, 참 은하씨는 오늘 회사는 어쩌고...”
“오늘부터 일주일 휴가예요.”
“이런! 귀중한 첫 휴가를 저와 같은 사람하고 이렇게 시간을 보내게 되셨군요... 이를 어쩌지요. 이거 죄송합니다.”
“아니요, 무슨 말씀을요... 전 지금 기분이 제법 좋은 데요... 후후”
정말 유쾌한 듯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그녀는 영훈의 곁으로 바짝 다가 선다.
거리를 오가는 많은 사람들이 두 사람을 힐끔 거리며 쳐다 보는 것이 눈에 띄였다.
영훈은 평소에 그가 가끔 가는 뒷 골목편에 있는 생맥주 집으로 그녀를 안내하면서, 밝은 밖에서의 그녀가 어두 침침한 카페 안에서의 첫 인상보다 훨씬 깨끗하고 매력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정말 이쁘십니다.”
“아부신가요?...호호호...”
“하하하...”
그렇게 둘은 마치 오랜 친구처럼 쉽게 다가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그 둘은 전혀 예상을 못하고 있었다.
이 만남이 그들의 인생에서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 지를.........
--- 아담이 썼습니다 ---
마치 대지를 온통 적시고 나서, 끝내는 모든 것을 쓸어 버릴 듯이 그렇게 비가 내리고 있었다.
영훈은 과음과 수면 부족으로 인한 숙취를 채 떨어버리지도 못한 채, 등교를 서두르고 있었다.
오전 8시 첫 강의는 1학년 때 빵구를 낸 교양 영어 시간이었다.
졸업을 위해서는 반드시 학점을 이수해야 하는 과목이므로, 졸업반이 되었지만, 어쩔 수 없이 수강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책 가방을 정리하면서, 지갑을 확인한 그는 긴 한숨을 내쉬지 않을 수 없었다.
낡아서 귀퉁이가 닳아버린 그의 반 지갑에는 달랑 천원짜리 2장만이 남아있었다.
월초에 고향에서 올라온 생활비는 이제 겨우 2주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남은 돈은 그게 전부였다.
워낙 빠듯하게 올라온 돈이었고, 그나마 그는 제대로 계획적으로 쓰지 못하고, 몇몇 친구들과 몇 번의 술로 다 써버리고 만 것이었다.
남은 반달의 생활이 그에게는 부담스러운 나날이 될 것이지만, 이미 익숙해져 버린 그런 생활에 그는 큰 걱정은 없었다. 단지, 불편할 뿐이었다.
자취방을 나서면서, 툇마루 밑에 쳐박혀 있던 살이 부러진 낡은 우산을 찾아 펼치면서 몸 하나도 제대로 가리지 못하는 우산을 낮게 바쳐 들며, 가방을 옆구리에 껴들고 잰 걸음으로 대문을 나선다.
대문 소리가 나자 안방 방문이 빠꿈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주인 아주머니였다.
낡은 우산 탓도 있지만, 워낙 거센 비에 얼마 걷지도 않아서 이미 바지춤은 물에 빤 듯이 흠뻑 젖어 들고 말았다.
과음 탓에 욕지기가 올라오는 것을 느끼며, 크게 가래침을 만들어 거센 비에 정신없이 농탕질을 당하는 길거리에 거침없이 뱉어내며 강의 시간에 대기위해 조금씩 걸음을 빨리 한다.
영훈이 2학년을 마치고 군대를 갖다 와서 다시 복학을 했을 때, 그가 가장 어색해 했던 것은 몇 년 사이에 크게 변한 학교의 분위기였다.
그가 2년의 생활을 했을 때의 학교는, 그를 비롯해서 그와 흡사한 고리타분한 남학생이 대부분이었고, 여학생은 그저 간호대나 사대정도에서만, 눈에 띄였던 것 같은데, 그 몇 년 사이에 학교에는 화사하고 제법 미태가 나는 여학생들이 많이 늘어났던 것이다.
사대에 미술 교육학과하고 음악 교육학과가 새로 생긴 탓에 많은 여학생이 이 남자들만이 득실거리던 교정을 이토록 화사하게 바꾸어 놓은 것이다.
괜시리 비실거리며 흘러나오는 웃음을 지으며, 걸음을 재촉한다.
이른 1교시 수업이었지만, 교양 과목인 관계로 많은 여학생들이 있었고, 지금 그는 강의실 전체에 가득한 분냄새가 마냥 좋기만 한 것이었다.
‘오래 살고 볼일이야...’
그는 그 몇 년 사이의 이런 많은 변화가 여간 신통하고 재미있는 게 아니었다.
강의실 맨 뒷줄에 앉은 그는 출석을 부르고, 강의가 진행되는 동안 평소와 다름없이 천천히 강의실 전체를 흝어 본다.
아무리 보아도, 큰 변화임에 틀림이 없었다.
다음 시간은 lab실에서 listening으로 진행된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수업이 끝나고, 다음 강의까지 남은 시간동안 모자란 잠을 청할 생각으로 어슬렁거리며 빈 강의실을 찾는 그에게 동기인 호선이가 다가오며 말을 건넨다.
“어제도 술을 좀 했구나...”
“응... 날도 덥고 해서 막걸리 한잔 했지...”
“언제는 이유가 없었냐?... 하하하...”
괜스레 짜증이 나는 웃음이었지만, 그는 그냥 지나치며 가벼운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한다.
301호.
교양관 강의실 중에서 가장 큰 방으로 보통 때는 수업이 없어, 자습을 하거나 쉬는 학생들이 많이 찾는 강의실이다.
영훈이 뒷문을 열고 들어서자 넓은 강의실에 혼자 있던 남학생이 뒤를 한번 돌아보고는 이내 펼쳐놓은 책으로 시선을 떨군다.
영훈은 문쪽에서 가장 가까운 자리를 잡고서는 커다란 영영 사전을 꺼내 그것을 베개 삼아 잠을 청하지만, 숙취와 두통으로 연신 작은 신음만이 나올 뿐 쉽게 잠이 오질 않는다.
얼마를 그렇게 뒤척이다 잠이 들었었나?
강의실이 소란스러워 잠을 깨보니, 수업이 있는 지 학생들이 꾸역 꾸역 모여들고 있었다.
그것도 잠이라고, 두통도 이른 아침보다는 훨씬 견딜 만해졌다.
문득, 그는 어제 점심때 라면 한 그릇 먹은 이후로 끼니라고는 아무것도 먹지 않은 게 생각이 나자, 더 많은 허기가 엄습해 오는 듯 했다.
그새 엄청나게 쏟아 붓던 폭우도 그치고, 해가 중천을 향해 가고 있었다. 문득 문득 나타나는 장마철의 해는 더욱 강렬한 느낌이 들었다.
화장실로 가 물을 몇 모금 마시고, 머리를 다시 묶고 나서 다음 강의를 빼먹고 학교 앞 분식집으로 향하면서, 가방을 뒤적거려 작년에 회사에 취직한 진웅이가 ‘요긴하게 써먹어라’ 라는 말과 함께 건내준 casio 전자 계산기를 꺼내 들었다.
지하 보도로 길을 건너 분식집이 있는 골목 초입에 있는 3층짜리 낡은 건물로 향했다.
학생들도 마구잡이로 남발하는 카드가 유행하고 나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전당포였다.
노랭이 영감과 한참동안의 실랑이 후에 만 오천원을 손에 쥐고는 터덜터덜 분식집으로 향했다.
라면에 밥 한 공기를 말아 먹어도 도통 포만감이 없다.
“아줌마... 밥이 왜이리 적어요?”
별 시덥지 않은 투정이었다.
아줌마는 익숙한 표정으로 반공기의 밥을 더 건네주며, ‘이게 수백 그릇이네’ 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밥을 먹고 분식집을 나서자, 문득 다시 학교에 가고 싶은 마음이 나질 않았다. 비록 수업은 두 강의가 더 있었지만 영 발걸음이 내키지 않았던 것이다.
딱히 갈 곳도 없이, 터덜거리며 걷던 그에게 문득 어제 밤 같이 술을 마신 병찬이가 오늘 오후 2시에 '종로에서 미팅을 잊지 않았지?' 라고 얘기를 했던 게 생각이 났다.
아마도 일전에 오가며 얘기를 했던 모양이었다. 술김에 '당연히 가야지...' 라며 호기를 부렸던게 생각이 나자, 아차 싶은 생각이 들었다.
길 건너에서도 보이는 교정의 시계탑을 보니, 이미 1시 40분을 넘어서고 있었다.
아무리 형편이 닿지 않는다 해도 친구와의 약속을 일방적으로 어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다시 길을 건너, 서둘러 종로행 버스에 올라타고 나서야 아침에 일어나서 양치질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
‘제기럴...’
차창을 거울 삼아, 얼굴을 쓸어 내리며 피곤한 몸을 의자 깊숙이 실으며 중얼거린 말이었다.
점심 시간 무렵이라 거리에 차들이 별로 없어, 2시가 조금 지나서 약속한 커피 샾에 도착할 수 있게 된 것은 다행이었다.
지하의 커피 샾 문을 젖히고 들어가자, 멀지 않은 곳에 병찬이와 몇몇의 친구가 눈에 띈다.
“거의 제 시간에 왔네”
병찬이는 영훈이가 술을 과음한 데다가, 누가 깨워주지도 않는 처지임을 잘 알고 있었기에, 혹시나 하는 염려를 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응... 점심도 먹고 왔다.”
자리에 앉으면서, 같이 앉아 있는 녀석들을 돌아보자, 모두들 별로 반갑지 않은 표정들로 그를 쳐다본다. 아마도 초췌한 모습의 영훈이가 미팅의 밝은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을 거라는 염려들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염려들 마라... 난 땜빵아니냐!”
괜스레 기분이 좋지않아, 투정아닌 투정을 부린다는 것이 병찬이가 들으면 미안하고 기분 나빠할 말이 터져 나오고 말았다.
“땜빵이라니... 아냐 임마. 니가 오늘의 진짜 주인공이야...”
빈말인줄 알지만, 귀에 대고 빠르게 주절대는 병찬이의 귀여운 얼굴이 오늘따라 더욱 앳되고 상큼해 보였다.
“그래 알았다.”
그렇게 몇 마디 나주지도 않아, 문이 열리며 한 떼거리의 여자들이 몰려 들어온다. 대충 숫자를 보니, 그들과 미팅을 하기로 한 여자 애들이라는 것을 알았다.
맨 앞으로 들어오던 자그마한 체구의 여자애가 병찬이를 보고 손을 들어 인사를 건네고는, 같이 온 애들을 영훈이 앉아 있는 테이블로 인도한다.
영훈은 본능적으로 자세가 반듯해 지는 것을 느끼며, 면면을 살펴 보니, 모두 인상이 깨끗하고 단정해 보였다.
소지품을 꺼내 각기 짝을 맞추는 순간에 병찬이가 자기 여자 친구에게 뭐라 귀엣말을 하는 것이 보였고, 이내 그 여자 애는 바로 옆에 앉아 있던 여자 애에게 뭐라 귀엣말을 하는 것이 보였다.
멀찌기 있어서 뭐라 하는 지는 전혀 들리지 刻年쨉? 그 여자 애가 팔을 뻗어 영훈이가 내놓은 네잎 클로버가 들어가 있는 열쇠 고리를 집어 든다.
다시 한번 얼굴을 살펴 보니, 제법 미모가 있는 여자 애였다.
갑자기 병찬이가 아까 귀엣말로 중얼거린 얘기가 떠올랐다.
‘정말인가?...’
여하튼 졸지에 미팅에 참석한 영훈은 그렇게 해서, 참으로 오랜만에 여자를 만나는 기회를 다시 갖게 된 것이었다.
문득, 그가 군에 있을 때까지 그를 기다리던 미정이가 떠올랐다.
그와 캠퍼스 커플이었던, 미정이는 그가 군대에 가있는 동안에, 졸업을 하고, 지금은 외국인 은행에서 fund manager 로 일을 하고 있는 그의 첫 사랑이었다.
둘은 너무도 깊이 사랑했지만, 미정이의 집에서 그의 집안 배경따위를 시비걸어 둘의 교제를 금지했고, 결국은 이렇게 둘을 갈라 놓고 만 것이었다.
미정이는 마지막 순간까지 영훈을 사랑한다고 했다.
“비록, 세상이 우리를 시기해 이토록 사랑하는 우릴, 이렇게 처참하게 갈라 놓는다 해도 난 너만을 사랑했고, 너만을 사랑할 거야...”
라는 말을 되내이며, 한 없는 눈물을 흘리고, 그렇게 남겨진 미정이었다.
‘씨팔...’
잊혀졌다고, 잊을 수 있다고, 아니 잊어야 한다고 수도 없이 생각하고 쇄뇌했건만 다 부질없는 노릇이었다.
‘씨팔...’
“네?”
영롱한 목소리가 영훈의 귓가에 울려 퍼지는 순간, 그는 파트너 여자가 자기 앞에 앉아 있다는 것을 인식했고, 그녀 앞에서 욕지거리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다른 생각을 좀 하고 있었어요... 정말 죄송합니다...”
“아니요. 괜찮아요. 저도 가끔 그래요. 차 안에서 공상을 하다가 집을 지나친 적이 한 두번이 아니거든요... 호호...”
웃음이 화사한 여자 애였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에게 미안해 하고, 그걸 이해하고 하면서 이야기를 해 나아갔다.
그녀는 병찬이 여자 친구 애와 같은 학교를 다니는 애가 아니었다. 단지 병찬이 여자 친구 애의 고등학교 동창으로, 대학은 다르지만 같은 연합 서클에 있던 애였다.
그리고, 병찬이 여자 친구 애가 재수를 하고 지금 4학년인 반면, 그녀는 금년 초에 졸업을 하고 금오 그룹 회장 비서실에 근무하고 있는 직장인이었다.
이름이, 은하라고 했다.
“성은 심씨 아니예요? 성까지 심씨면,사람들이 정말 뭔 영화배우 심은하인 줄 착각하겠어요...”
영훈의 객적은 소리에 기분이 유쾌한 지 그녀는 고개까지 뒤로 젖혀 가며 크게 웃어 보인다.
둘은 그렇게 서로에게 조금씩 조금씩 다가 가고 있었다.
“키가 얼마나 되세요?”
“네... 183입니다. 은하씨는 요?”
“전, 172예요. 너무 커서 볼품이 없지요?”
“아니요, 천만에요... 아주 보기 좋아요. 그야말로 ‘정말 자알 빠지셨습니다’... 하하하...”
그렇게 얘기를 나누는 사이, 영훈은 여자 친구와 나가면서 손을 들어 흔들어 보이며 윙크를 하는 병찬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사실은 제 친구하고 병찬씨에게서 영훈씨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순간 영훈은 병찬의 윙크와 그녀의 고백 아닌 고백으로 앞뒤 전후 사정을 대충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저... 우리 나가지요. 사실은 제가 비가 오는 날에는 술을 마시지 않으면 몸이 많이 아프거든요...”
깔끔하게 성장을 한 친구 놈들도 그렇고, 시끌시끌한 카페의 분위기도 그렇고, 영훈은 그 곳이 영 자기에게 어울리지 않는 곳이라는 생각에 서둘러 일행과 떨어져 그녀와 먼저 나와버리고 말았다.
“대낮인데, 괜찮겠어요?”
“대낮인건 괜찮은데, 참 은하씨는 오늘 회사는 어쩌고...”
“오늘부터 일주일 휴가예요.”
“이런! 귀중한 첫 휴가를 저와 같은 사람하고 이렇게 시간을 보내게 되셨군요... 이를 어쩌지요. 이거 죄송합니다.”
“아니요, 무슨 말씀을요... 전 지금 기분이 제법 좋은 데요... 후후”
정말 유쾌한 듯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그녀는 영훈의 곁으로 바짝 다가 선다.
거리를 오가는 많은 사람들이 두 사람을 힐끔 거리며 쳐다 보는 것이 눈에 띄였다.
영훈은 평소에 그가 가끔 가는 뒷 골목편에 있는 생맥주 집으로 그녀를 안내하면서, 밝은 밖에서의 그녀가 어두 침침한 카페 안에서의 첫 인상보다 훨씬 깨끗하고 매력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정말 이쁘십니다.”
“아부신가요?...호호호...”
“하하하...”
그렇게 둘은 마치 오랜 친구처럼 쉽게 다가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그 둘은 전혀 예상을 못하고 있었다.
이 만남이 그들의 인생에서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 지를.........
--- 아담이 썼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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