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립스틱* - 26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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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민우와 송나희는 능동의 어린이 대공원 담장 옆의 주택가 골목을 들어서고 있었다. 그들은 앞서서 걷고 있는 중년남자가 이따금 그들을 뒤돌아본다. 중년남자는 대로변에 있는 부동산의 중개인이었다. 그들을 앞서서 걷고 있던 부동산 중개인이 5층의 빌라 앞에서 멈추어 섰다. 하얀 인조대리석으로 건축된 깔끔한 빌라였다. 뒤를 돌아본 중개인이 빌라의 입구 문을 열고 들어섰다.
멈칫 거리던 송나희는 중개인과 강민우를 따라 층계를 올라갔다. 그들이 들어 선 곳은 3층의 현관 문 안이었다. 강민우가 송나희를 위해 구입한 집이었다. 이미 살고 있던 사람들은 이사를 했는지 집안은 텅 비어 있었다. 중개인이 그들을 향해 돌아섰다.
“잘 매입하신 겁니다. 건축한 지도 얼마 되지 않고 먼저 살던 사람이 미국으로 이주하기 때문에 급하게 내놓아서 시세보다 싸게 사신 겁니다. 되팔아도 이익이니까요.”
“마음에 드나 한번 둘러봐요.”
강민우의 말에 겸연쩍은 송나희는 마지못해 집안을 둘러본다. 주방과 터진 넓은 거실과 방들을 돌아본 송나희가 밝은 미소를 지었다. 무엇보다도 거실 유리창에서 손에 닿을 듯 내다보이는 어린이 대공원의 소나무 숲과 확 트인 시야가 마음에 들었다. 그녀의 흡족한 표정을 보고 강민우가 싱긋이 웃었다.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는데. 미리 물어보지 않아서 미안해.”
“아뇨! 마음에 들어요. 하지만, 너무 과분해서........”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네.”
그들을 빤히 바라보고 있던 중개인이 강민우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부인이신 모양이지요! 몇 식구나 되시는지, 언제 이사 오실 거죠?”
강민우와 송나희는 당황스러워서 서로를 쳐다보았다. 얼굴을 붉히는 송나희에게 강민우가 되물었다.
“이번 주일에 이사 할 수 있겠지?”
“네.......!”
강민우의 시선을 피한 송나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중개인이 들고 있던 열쇠꾸러미를 송나희에게 건네주었다.
“다행이네요. 아무래도 부인 되시는 분 마음에 들어야 좋지요. 저는 그럼 바빠서 가보겠습니다. 좋은 꿈꾸시고 더 부자 되십시오.”
주춤거리던 송나희가 열쇠 꾸러미를 받아 들었다. 중개인이 힐끔힐끔 그들의 표정을 살피며 현관문을 닫고 나갔다. 강민우가 안주머니에서 서류가 담긴 봉투를 꺼내 송나희에게 건네주었다. 그녀의 이름으로 매입한 매매계약서였다. 속눈썹이 자잘하게 떨리는 그녀가 서류봉투와 강민우를 번갈아 쳐다본다.
“너무........! 부담스러워요.”
“부담 가질 필요 없어. 이거보다 더한 선물도 해주고 싶은 마음이니까.”
“혼자 지내기는 너무 넓고.......! 받기만 해서 어쩌지요?”
“아니, 나도 받은 게 있는데.”
강민우가 빙그레 웃음을 띠었다. 송나희는 무슨 말을 하는지 의아스러운 표정을 하고 강민우를 쳐다봤다.
“네!? 제가 뭘.......!”
“나희 씨 마음! 아니면, 내가 훔친 건가!?”
“민우 씨는.......!? ”
“내가 훔친 건 아니지!?”
대답대신 미소를 띠었지만, 송나희는 정말 과분하게 느꼈다. 마지못해 집을 보긴 했지만, 조건 없는 선물에 어떻게 보답해야할지 모르겠다. 그녀는 어떻게 표현할지 몰라서 잠시 그를 마주보고 바라보았다. 강민우가 그녀의 손을 잡고 껴안았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을 양손으로 받쳐 들고 입술을 찾았다.
그녀는 눈을 사르르 감고 그의 입술을 기다렸다. 입술과 입술이 맞닿아 키스를 했다. 강민우가 가슴속으로 그녀를 부둥켜안았다. 가슴에 안긴 그녀는 입술을 맡기며 짜릿하고도 진한 감흥을 느꼈다. 바르르 떨림으로 안긴 그녀는 강민우의 목에 팔을 감고 매달렸다. 열려진 거실 창문으로 어린이 대공원에서 뛰어노는 어린아이들의 키들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군산의 신영동 재래시장, 좌판을 깔고 장사하는 상인들과 좁은 통로를 오가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사람들을 밀어내며 험상궂은 사내 두 명이 좌판을 발로 툭툭 걷어차며 걷고 있었다. 그런데도 상인들은 한마디도 못하고 바라만 보고 있다. 도리어 사내들이 다가오면 상인들은 자진해서 돈을 꺼내 사내들에게 건네준다. 상인들에게 자릿세를 받고 있는 것이다.
돈을 받아든 사내들은 거들먹거리며 걸음을 옮긴다. 그리고 사내들은 중앙에 좌판장사를 벌이고 있는 노점 상인들에게 다가갔다. 노점상인중에 사내들을 발견하고 겁에 질린 표정으로 일어서는 아줌마가 있었다. 아줌마에게 사내들이 다가갔다. 시골에서 키운 채소를 팔고 있는 아줌마였다.
“이 아주마시 또 여기 있네. 장사를 하려면 세금을 내야지.”
“아직 하나도 못 팔았어요. 봐주세요.”
“누구는 할 일 없어서 이 짓하는 줄 알아. 세금 안 내려면 여기서 장사하지 마.”
“아침도 못 먹고 있어요. 물건 팔면 드릴게요.”
“벌써 며칠째 공짜로 장사하면서.”
사내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체소들이 진열된 좌판을 발로 걷어찼다. 좌판 위에 있던 채소들이 길바닥으로 흩어졌다. 울상이 된 아줌마가 길바닥에 흩어진 채소들을 주섬주섬 주워 올린다. 그리고 마지못한 아줌마는 앞치마 속에서 꼬깃꼬깃 꾸겨진 지폐를 꺼낸다. 몇 푼 되지 않는 전 재산을 사내들에게 건네준다.
“진작 내놓을 것이지. 어제도 장사 날로 먹었잖아. 이건 어제 몫이고 오늘 몫은 장사해서 내 놔야 돼. 알았어, 아줌마!”
“네........!”
으름장을 놓는 사내들에게 돈을 빼앗기고도 아줌마는 주눅이 든 표정이다. 바라보고 있는 상인들은 방관하고 있었다. 사내들이 지나가고 나서야 상인들끼리 욕설을 뱉어낸다. 상인들은 두려워하고 있으나 사내들을 뒤따르는 남자가 있었다. 그는 최태웅을 통해 들은 곽춘호의 행방을 찾아 내려온 강민우였다.
곽춘호가 있음직한 장소를 돌아다니면서 수소문해 봤으나 행방이 묘연했다. 시장 통을 돌아다니던 사내들은 오래된 이층 건물로 들어섰다. 이층 복도에 들어선 사내들이 뒤쫓아 층계를 오르는 강민우를 발견하고 돌아섰다.
“당신은 뭐야?”
“내 발로 가는데 왜 물어봐?”
강민우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되물으며 사내들에게 다가섰다. 사내들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피식 웃음을 흘렸다. 한 사내가 팔짱을 끼고 강민우 앞으로 다가섰다.
“뭐, 이런 게 있어!? 여기가 어딘 줄 알고.......”
말을 채 끝나기도 전에 사내의 얼굴에 강민우의 주먹이 작렬하였다.
“핫~! 내 코.”
코와 입술에서 피를 터트린 사내는 엉덩방아를 찌며 주저앉았다. 옆에 있던 일행의 사내가 주머니에서 나이프를 꺼내 휘두르며 강민우에게 달려들었다.
“아쭈~! 넌 뭐야! 뒈지고 싶어 환장했구먼.”
바람소리를 가르며 휘저은 나이프가 강민우의 가슴을 향해 돌진해 왔다. 전광석화처럼 나이프를 피한 강민우의 발끝이 사내의 옆구리를 휘둘러 찼다. 급히 숨을 들이마시며 나이프를 놓친 사내는 머리로 벽을 들이받고 쓰러졌다. 상인들을 괴롭히는 소규모의 폭력배들은 강민우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강민우는 쓰러진 사내의 목을 팔로 감고 일으켜 세웠다. 코피를 흘리며 쓰러졌던 사내가 일어섰다. 화가 치민 사내는 흘린 코피를 주먹으로 문지르며 강민우에게 달려들었다.
“이런 X새끼!”
나이프를 휘둘렀던 사내의 목덜미를 움켜쥐고 담담한 서있던 강민우의 발끝이 허공으로 뻗쳤다. 달려들던 사내가 구두 발바닥을 보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가슴을 가격당한 사내는 숨을 쉴 수조차 없었다. 사내는 가슴을 걷어차여 우당탕하는 소리와 함께 복도 옆의 문을 들이받고 사무실 안으로 날아가 쓰러졌다.
사내의 목덜미를 팔로 감은 강민우가 사무실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사무실 안에는 책상에 양다리를 올려놓고 회전의자에 앉은 우람한 체격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 남자는 ‘불곰’이라는 호칭을 갖고 있는 그들의 보스였다. 한쪽 벽에는 야구방망이와 폭력에 사용하는 도구들이 보였다. 의자에 앉아 손톱을 깎고 있던 보스는 갑작스런 소란에 벌떡 일어섰다.
“뭐야!? 이 X 새끼는?”
“나! 너 같은 놈들 잡으러 다니는 어른이다.”
“뭐라고! 네놈이 어른이면, 나는 하나님이다. 이 X새끼야.”
보스인 불곰은 멋모르고 뛰어든 상대가 가소로웠다. 또한 부하들이 당한 것을 보고 분통이 치밀었다. 의자에서 벌떡 일어난 불곰은 벽에 세워진 야구방망이를 집어 들고 강민우를 향해 걸어갔다. 그도 한때는 군산의 큰 형님 밑에서 잔뼈가 굵은 건달이었다. 한 번에 강민우의 머리를 부실 듯이 방망이를 휘두르며 다가섰다.
그런데 강민우는 전혀 요동도 안하는 표정으로 서 있었다. 비웃는 듯 하는 상대의 모습에 분통이 터진 불곰은 방망이를 휘둘렀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야구방방이가 강민우의 머리를 향해 날아 들어왔다. 위기를 느끼는 순간에도 빤히 바라보고 있던 강민우가 옆에 놓인 의자를 발로 슬쩍 앞으로 걷어찼다.
달려들던 불곰은 밀려오는 의자를 피하려고 몸을 틀었다. 트릭이었다. 그 순간 강민우의 발끝이 불곰의 명치끝을 정확히 가격했다. 불곰은 언젠가 공수부대 출신이며 월남에 다녀왔다는 놈과 맞서서 참패를 당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놈보다도 무서운 상대라는 것을 직감했다.
뒷걸음질 치던 불곰이 바닥에 벌렁 나자빠졌다. 강민우는 팔로 감고 있던 사내의 목을 비틀어 던졌다. 그리고 숨 쉴 틈도 주지 않고 불곰의 허리를 걷어찼다. 이어서 불곰의 고환을 움켜쥐었다. 새파랗게 질린 불곰은 고환이 터지는 고통을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하 악~! 치. 치사하게.......! 나, 주, 죽겠어.”
“전부 무릎 꿇으라고 해!”
“야! 병신들아! 형님 말씀 안 들려. 아이고, 나죽겠네.”
쓰러졌던 사내들이 슬금슬금 눈치를 살피며 강민우를 향해 무릎을 꿇고 앉았다. 강민우는 고환을 움켜쥐고 있는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일그러진 표정으로 불곰이 쩔쩔매며 곧 죽을 듯이 아우성쳤다.
“아이고! 사람 죽네. 혀, 형님! 이것 좀 놔줘요. 아직 씨도 안 받았는데. 사, 살려주세요.”
강민우는 손아귀에 움켜쥐었던 고환을 놓아 주었다. 그리고 야구방망이를 들고 의자에 걸터앉았다. 바닥에 쓰러져 뒹굴던 불곰은 한숨을 내쉬며 강민우 앞에 무릎을 꿇었다. 강민우가 들고 있는 방망이로 불곰의 머리를 툭툭 쳤다.
“너 이름이 뭐야?”
“불곰이라고 합니다.”
“아니 본명이 뭐냐고?”
“문열공계의 전주 최씨이고 이름은 중혁입니다.”
불곰은 자신의 성씨 본관을 자랑스럽다는 듯이 이름을 밝혔다. 그러나 강민우는 그의 이름에는 관심이 없었다.
“곽춘호라는 이름 들어봤나?”
“곽춘호.......!? 처음 들어 보는 이름입니다. 이래봬도 군산 바닥에서는 내가 모르는 놈은 없습니다.”
“정말이야?”
“네. 정말입니다. 그런데 형님은 누구십니까?”
“나?”
“네. 처음 뵙는 거 같아서요.”
“석관동이 어딘 줄 아나?”
“서울, 석관동!? 그럼 안기부에 계십니까?”
“내 말을 잘 들으면 너희들은 괴롭히지 않아.”
“네. 네! 말씀만 하십시오.”
“곽춘호를 알게 되면 연락해. 목장이나 농장을 하는 놈일 거야.”
“네. 명심하겠습니다.”
강민우가 자신의 책상에 놓인 전화번호가 적힌 명함을 불곰에게 건네주었다. 불곰은 명함을 받아들고 들여다보고는 강민우의 눈치를 살폈다. 물론 얕잡아 보았기도 했지만, 보기 드물게 빠른 몸놀림의 실력이었다. 묵묵히 그들을 내려다보던 강민우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무릎을 꿇고 있던 그들은 두려운 표정이었다.
강민우가 들고 있던 야구방망이를 집어 던지고 그들의 옆으로 다가왔다. 그들은 다시 얻어맞지나 않을는지 염려되어 흠칫하였다. 그러나 강민우는 그들 곁을 지나 뚜벅뚜벅 걸어서 사무실을 나갔다.
강민우의 모습이 사라지자, 무릎을 꿇고 앉아있던 불곰이 벌떡 일어나서 시근덕거렸다. 머리끝까지 화가 치민 불곰은 강민우가 던진 야구방망이를 들고 부하들을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이 X 같은 새끼들아! 나가서 죽어. 병신들아!”
강민우에게 당한 분풀이를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이런 수모를 당해 본적이 없기에 생각만 할수록 원통하기 짝이 없었다. 몇 차례 휘두르던 방망이를 팽개쳤다. 불곰은 받았던 명함을 다시 들여다봤다. 그가 알고 있는 상식으로도 분명히 안기부 직원이 확실했다. 씁쓸한 입맛을 다시며 명함을 호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층계를 내려오면서 강민우는 부하들을 구타하는 보스의 화난 목소리를 들었다. 묵묵히 층계를 내려온 강민우는 다시 재래시장 골목으로 들어섰다. 지금까지 군산 주변을 돌아다니며 곽춘호에 대한 행방을 수소문 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폭력배들을 제압할 때마다 곽춘호에 대한 정보를 알아내려고 연락처를 알려주고 있었다.
하늘은 낮게 내려와 있고 아주 흐린 날씨였다. 무거운 회색빛 하늘이 건물 뒤편마다 축축 늘어져 있고 자세히 보면 온 세상이 안개 속에 갈아 앉은 듯도 했다. 바람이 불어와 옷깃 속으로 스며들고 나뭇가지에 매달려있는 이파리마저 떨어트린다.
군자역 사거리 횡단보도의 푸른 신호등이 깜박거렸다. 횡단보도를 뛰어 건너려든 송나희는 노란 신호등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발걸음을 멈췄다. 한차례 바람이 불어와 그녀의 후렌치코트 깃이 휘날렸다. 그녀는 직원들과의 저녁식사를 하는 음식점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그동안 미루고 있던 직원들끼리 자축하는 의미의 식사자리였다. 송나희는 며칠 전에 강민우가 마련해준 능동으로 이사를 했다. 마침 식사를 할 장소가 군자역 근처이기에 집에 들렀다 가는 길이었다. 신호등이 바뀌고 그녀는 부리나케 길을 건너 음식점 간판을 살폈다. 약속장소인 음식점 간판에는 입에 돈을 물고 있는 돼지머리 그림이 있었다. 뿌옇게 김이 서린 음식점 유리문을 열고 들어갔다.
잔뜩 추워진 날씨 때문이지 매캐한 연기가 자욱한 음식점 안은 훈훈했다. 한해의 마지막 달력이 걸린 구석진 곳에 그녀가 찾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전희재 과장을 비롯하여 홍성식, 강민우와 유서연의 모습도 보였다. 그녀를 발견한 유서연이 손짓을 한다.
손님들의 식탁사이를 빠져나간 송나희가 그들 앞에 멈추어 섰다. 그들은 벌써 한 잔 했는지 열띤 토론을 하고 있었다. 옆 테이블에 놓인 빈 의자를 집어 든 송나희는 어디에 앉아야 할지 망설였다. 유서연의 양쪽에는 강민우와 홍성식이 앉아 있었다. 강민우를 힐끔 쳐다본 유서연이 한쪽 눈을 질끈 감아 윙크를 해 보인다.
“언니, 여기 앉아!”
유서연이 강민우 옆으로 다가 앉으며 홍성식의 옆 공간을 가리켰다. 대화에 열중하고 있던 강민우의 눈동자가 송나희를 향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송나희만이 느낄 수 있는 의미 깊은 눈빛이었다. 망설이던 송나희는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며 강민우와 유서연 사이에 의자를 놓고 앉았다. 멍하니 바라보던 유서연이 송나희 앞에 유리잔을 놓으면서 맥주를 따라주었다.
“우린 한 잔 씩 했는데, 언니 한잔해. 아! 이제 실장님이지! 호호~! 실장님 축하해요.”
“미스 송은 벌주로 한잔 더해야 돼.”
열띤 목소리로 대화를 하고 있던 전희재 과장이 송나희를 향해 한 마디 던졌다. 모두들 전 과장의 말에 웃음을 흘렸다. 강민우의 옆자리를 빼앗기고 싶지 않았던 유서연은 억지 미소를 지어 보였다. 홍성식이 유서연과 송나희를 유심히 번갈아 바라봤다. 송나희는 가벼운 미소를 지으면서 맥주잔을 들었다. 전 과장은 다시 하고 있던 말을 이어서 강조한다.
“과연 물질문명이 고도로 발달하고 철저한 개인주의와 함께 합리적인 이성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국가에 대한 봉사만을 고집할 수는 없다고 봐. 물론 자신의 사생활이 철저하게 보장되고 있다고 하지만, 환경이 다른 개개인의 생활에 대해서는 무관심할 수밖에 없어. 어떤 면에서는 최재인 실장도 희생자일 수도 있어.”
“전 과장님 말씀도 맞지만, 그렇다고 공직에 있으면서 사리사욕을 위해 국가 재산을 이용하는 것은 국민들을 희생시키는 결과이지요. 저는 개인주의적인 생각으로 희생당하는 사람들이 없어야 된다고 생각해요.”
담담하게 듣고만 있던 강민우가 입을 열자, 전 과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강 실장 말이 맞아. 내 말은 상대적인 인간의 심리에 대해서 말하는 거야. 최 실장이나 홍성식의 행동의 결과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기 위한 목적이 아니고, 개인적인 행복을 추구하다보니 도리어 불행을 초래했다는 것이지.”
“사람은 자신이나 자신의 가정만을 추구해서는 결코 행복 할 수 없다고 봅니다. 인간이 아무리 홀로 태어나 홀로 죽는다고 해도 사람들과 더불어 살지 않으면 외로울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리고 현실은 희생당하면서 고통 받는 사람들을 무관심하게 외면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도 하겠지. 그러나 얼마나 대중적이냐가 문제겠지. 백 프로 행복이란 있을 수 있을까! 지구상의 모든 사람이 행복할 수는 없잖아. 행복은 고통을 수반한다고도 하잖아. 인생은 시소 같은 것이 아닐까! 한쪽이 불행하면 한쪽이 행복하고. 반복되는 것인지도 모르잖아.”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다른 사람을 고통 받게 하는 사람들은 누가 응징합니까. 마땅히 벌을 받아야지요.”
홍성식은 왠지 분위기가 가라앉고 있다고 느꼈다. 눈치를 살피던 홍성식이 술잔을 들어 권했다.
“자! 선배님들 이야기는 나중에 하시고 술 한 잔 씩 더하시죠.”
“그래! 모두 즐겁게 마시지고.”
서로의 빈 잔에 맥주를 따랐다. 그리고 잔을 들어서 부딪치며 서로의 승진을 축하했다. 단숨에 술잔을 비우고 내려놓은 홍성식이 유서연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유서연이 그의 시선을 의식하고 고개를 돌렸다.
“내 얼굴에 뭐 묻었어요!? 숙녀 얼굴을 왜 그렇게 봐요?”
“전에는 별로였는데, 오늘따라 서연씨가 예뻐 보이는데.”
“피 잇~! 취하지도 않았으면서 괜히, 술주정 하지 말아요.”
“남자한테 프러포즈도 못 받아 봤나봐.”
얼굴을 붉히는 유서연을 보고 홍성식이 능청스런 표정을 했다. 그런데 별안간 유서연이 두 주먹을 쥐고 홍성식의 어깨를 마구 두들겼다. 홍성식이 슬그머니 스커트 위로 들어난 유서연의 엉덩이를 쓰다듬은 것이다. 유서연이 홍성식을 노려보며 눈을 흘겼다.
“엉큼하게 어딜 만져요. 변태같이.”
“난 좋아서 그런데.”
“난 엉큼한 사람 싫어요. 매너 없이.”
“그럼 매너 있게 프러포즈할까!”
홍성식이 짓궂은 표정으로 유서연의 어깨를 껴안았다. 유서연이 홍성식을 떠밀며 다시 두 주먹을 휘둘렀다. 그들의 모습을 보고 모두들 한바탕 웃음을 터트렸다. 유서연은 홍성식이 능글맞게 다가오기는 했지만 과히 싫지 않으면서도 뽀로통하게 입술을 내밀었다. 홍성식이 눈을 질끈 감으면서 비트작전에서 부상당했던 팔을 붙들고 엄살을 했다.
“아이쿠! 구멍 뚫린 팔, 바람세겠네.”
“미, 미안해요. 그렇지만, 그런 식으로 프러포즈하는 남자를 어느 여자가 좋아해요.”
“하하하........!”
“호호.......!”
“그러다가 정말 둘이서 연애하겠네.”
모두들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송나희도 활짝 웃으면서 강미우를 흘깃 쳐다봤다. 이야기 방향이 바뀌어 언론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는 탤런트들의 사생활에 관한 대화가 시작됐다. 그리고 서로의 빈 잔을 채워주며 농담을 곁들인 흥겨운 분위기가 이어졌다.
술기운이 거나해진 전 과장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애들이 치킨을 사오라고해서 먼저 갈게. 술값은 내가 낼 테니 즐겁게 놀다가 와.”
“벌써 가시게요?”
“응, 난 취해서 들어가면 마누라한테 바가지 긁혀.”
“역시 과장님은 애처가이시네.”
전 과장의 뒤를 이어 유서연과 홍성식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도 이만 가봐야 해요.”
“나도 갈 건데.”
모두 일어서니 강민우와 송나희만이 남아 있을 수가 없었다. 그들도 따라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음식점 밖으로 나오니 술기운에 달아올랐던 온도 때문인지 그렇게 추운 날씨 같지가 않았다. 더욱이나 하늘에서는 눈송이가 떨어지고 있어 한결 훈훈한 기분이 들었다. 전 과장이 손을 흔들며 택시를 타고 사라졌다.-----
멈칫 거리던 송나희는 중개인과 강민우를 따라 층계를 올라갔다. 그들이 들어 선 곳은 3층의 현관 문 안이었다. 강민우가 송나희를 위해 구입한 집이었다. 이미 살고 있던 사람들은 이사를 했는지 집안은 텅 비어 있었다. 중개인이 그들을 향해 돌아섰다.
“잘 매입하신 겁니다. 건축한 지도 얼마 되지 않고 먼저 살던 사람이 미국으로 이주하기 때문에 급하게 내놓아서 시세보다 싸게 사신 겁니다. 되팔아도 이익이니까요.”
“마음에 드나 한번 둘러봐요.”
강민우의 말에 겸연쩍은 송나희는 마지못해 집안을 둘러본다. 주방과 터진 넓은 거실과 방들을 돌아본 송나희가 밝은 미소를 지었다. 무엇보다도 거실 유리창에서 손에 닿을 듯 내다보이는 어린이 대공원의 소나무 숲과 확 트인 시야가 마음에 들었다. 그녀의 흡족한 표정을 보고 강민우가 싱긋이 웃었다.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는데. 미리 물어보지 않아서 미안해.”
“아뇨! 마음에 들어요. 하지만, 너무 과분해서........”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네.”
그들을 빤히 바라보고 있던 중개인이 강민우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부인이신 모양이지요! 몇 식구나 되시는지, 언제 이사 오실 거죠?”
강민우와 송나희는 당황스러워서 서로를 쳐다보았다. 얼굴을 붉히는 송나희에게 강민우가 되물었다.
“이번 주일에 이사 할 수 있겠지?”
“네.......!”
강민우의 시선을 피한 송나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중개인이 들고 있던 열쇠꾸러미를 송나희에게 건네주었다.
“다행이네요. 아무래도 부인 되시는 분 마음에 들어야 좋지요. 저는 그럼 바빠서 가보겠습니다. 좋은 꿈꾸시고 더 부자 되십시오.”
주춤거리던 송나희가 열쇠 꾸러미를 받아 들었다. 중개인이 힐끔힐끔 그들의 표정을 살피며 현관문을 닫고 나갔다. 강민우가 안주머니에서 서류가 담긴 봉투를 꺼내 송나희에게 건네주었다. 그녀의 이름으로 매입한 매매계약서였다. 속눈썹이 자잘하게 떨리는 그녀가 서류봉투와 강민우를 번갈아 쳐다본다.
“너무........! 부담스러워요.”
“부담 가질 필요 없어. 이거보다 더한 선물도 해주고 싶은 마음이니까.”
“혼자 지내기는 너무 넓고.......! 받기만 해서 어쩌지요?”
“아니, 나도 받은 게 있는데.”
강민우가 빙그레 웃음을 띠었다. 송나희는 무슨 말을 하는지 의아스러운 표정을 하고 강민우를 쳐다봤다.
“네!? 제가 뭘.......!”
“나희 씨 마음! 아니면, 내가 훔친 건가!?”
“민우 씨는.......!? ”
“내가 훔친 건 아니지!?”
대답대신 미소를 띠었지만, 송나희는 정말 과분하게 느꼈다. 마지못해 집을 보긴 했지만, 조건 없는 선물에 어떻게 보답해야할지 모르겠다. 그녀는 어떻게 표현할지 몰라서 잠시 그를 마주보고 바라보았다. 강민우가 그녀의 손을 잡고 껴안았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을 양손으로 받쳐 들고 입술을 찾았다.
그녀는 눈을 사르르 감고 그의 입술을 기다렸다. 입술과 입술이 맞닿아 키스를 했다. 강민우가 가슴속으로 그녀를 부둥켜안았다. 가슴에 안긴 그녀는 입술을 맡기며 짜릿하고도 진한 감흥을 느꼈다. 바르르 떨림으로 안긴 그녀는 강민우의 목에 팔을 감고 매달렸다. 열려진 거실 창문으로 어린이 대공원에서 뛰어노는 어린아이들의 키들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군산의 신영동 재래시장, 좌판을 깔고 장사하는 상인들과 좁은 통로를 오가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사람들을 밀어내며 험상궂은 사내 두 명이 좌판을 발로 툭툭 걷어차며 걷고 있었다. 그런데도 상인들은 한마디도 못하고 바라만 보고 있다. 도리어 사내들이 다가오면 상인들은 자진해서 돈을 꺼내 사내들에게 건네준다. 상인들에게 자릿세를 받고 있는 것이다.
돈을 받아든 사내들은 거들먹거리며 걸음을 옮긴다. 그리고 사내들은 중앙에 좌판장사를 벌이고 있는 노점 상인들에게 다가갔다. 노점상인중에 사내들을 발견하고 겁에 질린 표정으로 일어서는 아줌마가 있었다. 아줌마에게 사내들이 다가갔다. 시골에서 키운 채소를 팔고 있는 아줌마였다.
“이 아주마시 또 여기 있네. 장사를 하려면 세금을 내야지.”
“아직 하나도 못 팔았어요. 봐주세요.”
“누구는 할 일 없어서 이 짓하는 줄 알아. 세금 안 내려면 여기서 장사하지 마.”
“아침도 못 먹고 있어요. 물건 팔면 드릴게요.”
“벌써 며칠째 공짜로 장사하면서.”
사내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체소들이 진열된 좌판을 발로 걷어찼다. 좌판 위에 있던 채소들이 길바닥으로 흩어졌다. 울상이 된 아줌마가 길바닥에 흩어진 채소들을 주섬주섬 주워 올린다. 그리고 마지못한 아줌마는 앞치마 속에서 꼬깃꼬깃 꾸겨진 지폐를 꺼낸다. 몇 푼 되지 않는 전 재산을 사내들에게 건네준다.
“진작 내놓을 것이지. 어제도 장사 날로 먹었잖아. 이건 어제 몫이고 오늘 몫은 장사해서 내 놔야 돼. 알았어, 아줌마!”
“네........!”
으름장을 놓는 사내들에게 돈을 빼앗기고도 아줌마는 주눅이 든 표정이다. 바라보고 있는 상인들은 방관하고 있었다. 사내들이 지나가고 나서야 상인들끼리 욕설을 뱉어낸다. 상인들은 두려워하고 있으나 사내들을 뒤따르는 남자가 있었다. 그는 최태웅을 통해 들은 곽춘호의 행방을 찾아 내려온 강민우였다.
곽춘호가 있음직한 장소를 돌아다니면서 수소문해 봤으나 행방이 묘연했다. 시장 통을 돌아다니던 사내들은 오래된 이층 건물로 들어섰다. 이층 복도에 들어선 사내들이 뒤쫓아 층계를 오르는 강민우를 발견하고 돌아섰다.
“당신은 뭐야?”
“내 발로 가는데 왜 물어봐?”
강민우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되물으며 사내들에게 다가섰다. 사내들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피식 웃음을 흘렸다. 한 사내가 팔짱을 끼고 강민우 앞으로 다가섰다.
“뭐, 이런 게 있어!? 여기가 어딘 줄 알고.......”
말을 채 끝나기도 전에 사내의 얼굴에 강민우의 주먹이 작렬하였다.
“핫~! 내 코.”
코와 입술에서 피를 터트린 사내는 엉덩방아를 찌며 주저앉았다. 옆에 있던 일행의 사내가 주머니에서 나이프를 꺼내 휘두르며 강민우에게 달려들었다.
“아쭈~! 넌 뭐야! 뒈지고 싶어 환장했구먼.”
바람소리를 가르며 휘저은 나이프가 강민우의 가슴을 향해 돌진해 왔다. 전광석화처럼 나이프를 피한 강민우의 발끝이 사내의 옆구리를 휘둘러 찼다. 급히 숨을 들이마시며 나이프를 놓친 사내는 머리로 벽을 들이받고 쓰러졌다. 상인들을 괴롭히는 소규모의 폭력배들은 강민우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강민우는 쓰러진 사내의 목을 팔로 감고 일으켜 세웠다. 코피를 흘리며 쓰러졌던 사내가 일어섰다. 화가 치민 사내는 흘린 코피를 주먹으로 문지르며 강민우에게 달려들었다.
“이런 X새끼!”
나이프를 휘둘렀던 사내의 목덜미를 움켜쥐고 담담한 서있던 강민우의 발끝이 허공으로 뻗쳤다. 달려들던 사내가 구두 발바닥을 보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가슴을 가격당한 사내는 숨을 쉴 수조차 없었다. 사내는 가슴을 걷어차여 우당탕하는 소리와 함께 복도 옆의 문을 들이받고 사무실 안으로 날아가 쓰러졌다.
사내의 목덜미를 팔로 감은 강민우가 사무실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사무실 안에는 책상에 양다리를 올려놓고 회전의자에 앉은 우람한 체격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 남자는 ‘불곰’이라는 호칭을 갖고 있는 그들의 보스였다. 한쪽 벽에는 야구방망이와 폭력에 사용하는 도구들이 보였다. 의자에 앉아 손톱을 깎고 있던 보스는 갑작스런 소란에 벌떡 일어섰다.
“뭐야!? 이 X 새끼는?”
“나! 너 같은 놈들 잡으러 다니는 어른이다.”
“뭐라고! 네놈이 어른이면, 나는 하나님이다. 이 X새끼야.”
보스인 불곰은 멋모르고 뛰어든 상대가 가소로웠다. 또한 부하들이 당한 것을 보고 분통이 치밀었다. 의자에서 벌떡 일어난 불곰은 벽에 세워진 야구방망이를 집어 들고 강민우를 향해 걸어갔다. 그도 한때는 군산의 큰 형님 밑에서 잔뼈가 굵은 건달이었다. 한 번에 강민우의 머리를 부실 듯이 방망이를 휘두르며 다가섰다.
그런데 강민우는 전혀 요동도 안하는 표정으로 서 있었다. 비웃는 듯 하는 상대의 모습에 분통이 터진 불곰은 방망이를 휘둘렀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야구방방이가 강민우의 머리를 향해 날아 들어왔다. 위기를 느끼는 순간에도 빤히 바라보고 있던 강민우가 옆에 놓인 의자를 발로 슬쩍 앞으로 걷어찼다.
달려들던 불곰은 밀려오는 의자를 피하려고 몸을 틀었다. 트릭이었다. 그 순간 강민우의 발끝이 불곰의 명치끝을 정확히 가격했다. 불곰은 언젠가 공수부대 출신이며 월남에 다녀왔다는 놈과 맞서서 참패를 당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놈보다도 무서운 상대라는 것을 직감했다.
뒷걸음질 치던 불곰이 바닥에 벌렁 나자빠졌다. 강민우는 팔로 감고 있던 사내의 목을 비틀어 던졌다. 그리고 숨 쉴 틈도 주지 않고 불곰의 허리를 걷어찼다. 이어서 불곰의 고환을 움켜쥐었다. 새파랗게 질린 불곰은 고환이 터지는 고통을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하 악~! 치. 치사하게.......! 나, 주, 죽겠어.”
“전부 무릎 꿇으라고 해!”
“야! 병신들아! 형님 말씀 안 들려. 아이고, 나죽겠네.”
쓰러졌던 사내들이 슬금슬금 눈치를 살피며 강민우를 향해 무릎을 꿇고 앉았다. 강민우는 고환을 움켜쥐고 있는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일그러진 표정으로 불곰이 쩔쩔매며 곧 죽을 듯이 아우성쳤다.
“아이고! 사람 죽네. 혀, 형님! 이것 좀 놔줘요. 아직 씨도 안 받았는데. 사, 살려주세요.”
강민우는 손아귀에 움켜쥐었던 고환을 놓아 주었다. 그리고 야구방망이를 들고 의자에 걸터앉았다. 바닥에 쓰러져 뒹굴던 불곰은 한숨을 내쉬며 강민우 앞에 무릎을 꿇었다. 강민우가 들고 있는 방망이로 불곰의 머리를 툭툭 쳤다.
“너 이름이 뭐야?”
“불곰이라고 합니다.”
“아니 본명이 뭐냐고?”
“문열공계의 전주 최씨이고 이름은 중혁입니다.”
불곰은 자신의 성씨 본관을 자랑스럽다는 듯이 이름을 밝혔다. 그러나 강민우는 그의 이름에는 관심이 없었다.
“곽춘호라는 이름 들어봤나?”
“곽춘호.......!? 처음 들어 보는 이름입니다. 이래봬도 군산 바닥에서는 내가 모르는 놈은 없습니다.”
“정말이야?”
“네. 정말입니다. 그런데 형님은 누구십니까?”
“나?”
“네. 처음 뵙는 거 같아서요.”
“석관동이 어딘 줄 아나?”
“서울, 석관동!? 그럼 안기부에 계십니까?”
“내 말을 잘 들으면 너희들은 괴롭히지 않아.”
“네. 네! 말씀만 하십시오.”
“곽춘호를 알게 되면 연락해. 목장이나 농장을 하는 놈일 거야.”
“네. 명심하겠습니다.”
강민우가 자신의 책상에 놓인 전화번호가 적힌 명함을 불곰에게 건네주었다. 불곰은 명함을 받아들고 들여다보고는 강민우의 눈치를 살폈다. 물론 얕잡아 보았기도 했지만, 보기 드물게 빠른 몸놀림의 실력이었다. 묵묵히 그들을 내려다보던 강민우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무릎을 꿇고 있던 그들은 두려운 표정이었다.
강민우가 들고 있던 야구방망이를 집어 던지고 그들의 옆으로 다가왔다. 그들은 다시 얻어맞지나 않을는지 염려되어 흠칫하였다. 그러나 강민우는 그들 곁을 지나 뚜벅뚜벅 걸어서 사무실을 나갔다.
강민우의 모습이 사라지자, 무릎을 꿇고 앉아있던 불곰이 벌떡 일어나서 시근덕거렸다. 머리끝까지 화가 치민 불곰은 강민우가 던진 야구방망이를 들고 부하들을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이 X 같은 새끼들아! 나가서 죽어. 병신들아!”
강민우에게 당한 분풀이를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이런 수모를 당해 본적이 없기에 생각만 할수록 원통하기 짝이 없었다. 몇 차례 휘두르던 방망이를 팽개쳤다. 불곰은 받았던 명함을 다시 들여다봤다. 그가 알고 있는 상식으로도 분명히 안기부 직원이 확실했다. 씁쓸한 입맛을 다시며 명함을 호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층계를 내려오면서 강민우는 부하들을 구타하는 보스의 화난 목소리를 들었다. 묵묵히 층계를 내려온 강민우는 다시 재래시장 골목으로 들어섰다. 지금까지 군산 주변을 돌아다니며 곽춘호에 대한 행방을 수소문 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폭력배들을 제압할 때마다 곽춘호에 대한 정보를 알아내려고 연락처를 알려주고 있었다.
하늘은 낮게 내려와 있고 아주 흐린 날씨였다. 무거운 회색빛 하늘이 건물 뒤편마다 축축 늘어져 있고 자세히 보면 온 세상이 안개 속에 갈아 앉은 듯도 했다. 바람이 불어와 옷깃 속으로 스며들고 나뭇가지에 매달려있는 이파리마저 떨어트린다.
군자역 사거리 횡단보도의 푸른 신호등이 깜박거렸다. 횡단보도를 뛰어 건너려든 송나희는 노란 신호등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발걸음을 멈췄다. 한차례 바람이 불어와 그녀의 후렌치코트 깃이 휘날렸다. 그녀는 직원들과의 저녁식사를 하는 음식점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그동안 미루고 있던 직원들끼리 자축하는 의미의 식사자리였다. 송나희는 며칠 전에 강민우가 마련해준 능동으로 이사를 했다. 마침 식사를 할 장소가 군자역 근처이기에 집에 들렀다 가는 길이었다. 신호등이 바뀌고 그녀는 부리나케 길을 건너 음식점 간판을 살폈다. 약속장소인 음식점 간판에는 입에 돈을 물고 있는 돼지머리 그림이 있었다. 뿌옇게 김이 서린 음식점 유리문을 열고 들어갔다.
잔뜩 추워진 날씨 때문이지 매캐한 연기가 자욱한 음식점 안은 훈훈했다. 한해의 마지막 달력이 걸린 구석진 곳에 그녀가 찾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전희재 과장을 비롯하여 홍성식, 강민우와 유서연의 모습도 보였다. 그녀를 발견한 유서연이 손짓을 한다.
손님들의 식탁사이를 빠져나간 송나희가 그들 앞에 멈추어 섰다. 그들은 벌써 한 잔 했는지 열띤 토론을 하고 있었다. 옆 테이블에 놓인 빈 의자를 집어 든 송나희는 어디에 앉아야 할지 망설였다. 유서연의 양쪽에는 강민우와 홍성식이 앉아 있었다. 강민우를 힐끔 쳐다본 유서연이 한쪽 눈을 질끈 감아 윙크를 해 보인다.
“언니, 여기 앉아!”
유서연이 강민우 옆으로 다가 앉으며 홍성식의 옆 공간을 가리켰다. 대화에 열중하고 있던 강민우의 눈동자가 송나희를 향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송나희만이 느낄 수 있는 의미 깊은 눈빛이었다. 망설이던 송나희는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며 강민우와 유서연 사이에 의자를 놓고 앉았다. 멍하니 바라보던 유서연이 송나희 앞에 유리잔을 놓으면서 맥주를 따라주었다.
“우린 한 잔 씩 했는데, 언니 한잔해. 아! 이제 실장님이지! 호호~! 실장님 축하해요.”
“미스 송은 벌주로 한잔 더해야 돼.”
열띤 목소리로 대화를 하고 있던 전희재 과장이 송나희를 향해 한 마디 던졌다. 모두들 전 과장의 말에 웃음을 흘렸다. 강민우의 옆자리를 빼앗기고 싶지 않았던 유서연은 억지 미소를 지어 보였다. 홍성식이 유서연과 송나희를 유심히 번갈아 바라봤다. 송나희는 가벼운 미소를 지으면서 맥주잔을 들었다. 전 과장은 다시 하고 있던 말을 이어서 강조한다.
“과연 물질문명이 고도로 발달하고 철저한 개인주의와 함께 합리적인 이성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국가에 대한 봉사만을 고집할 수는 없다고 봐. 물론 자신의 사생활이 철저하게 보장되고 있다고 하지만, 환경이 다른 개개인의 생활에 대해서는 무관심할 수밖에 없어. 어떤 면에서는 최재인 실장도 희생자일 수도 있어.”
“전 과장님 말씀도 맞지만, 그렇다고 공직에 있으면서 사리사욕을 위해 국가 재산을 이용하는 것은 국민들을 희생시키는 결과이지요. 저는 개인주의적인 생각으로 희생당하는 사람들이 없어야 된다고 생각해요.”
담담하게 듣고만 있던 강민우가 입을 열자, 전 과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강 실장 말이 맞아. 내 말은 상대적인 인간의 심리에 대해서 말하는 거야. 최 실장이나 홍성식의 행동의 결과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기 위한 목적이 아니고, 개인적인 행복을 추구하다보니 도리어 불행을 초래했다는 것이지.”
“사람은 자신이나 자신의 가정만을 추구해서는 결코 행복 할 수 없다고 봅니다. 인간이 아무리 홀로 태어나 홀로 죽는다고 해도 사람들과 더불어 살지 않으면 외로울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리고 현실은 희생당하면서 고통 받는 사람들을 무관심하게 외면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도 하겠지. 그러나 얼마나 대중적이냐가 문제겠지. 백 프로 행복이란 있을 수 있을까! 지구상의 모든 사람이 행복할 수는 없잖아. 행복은 고통을 수반한다고도 하잖아. 인생은 시소 같은 것이 아닐까! 한쪽이 불행하면 한쪽이 행복하고. 반복되는 것인지도 모르잖아.”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다른 사람을 고통 받게 하는 사람들은 누가 응징합니까. 마땅히 벌을 받아야지요.”
홍성식은 왠지 분위기가 가라앉고 있다고 느꼈다. 눈치를 살피던 홍성식이 술잔을 들어 권했다.
“자! 선배님들 이야기는 나중에 하시고 술 한 잔 씩 더하시죠.”
“그래! 모두 즐겁게 마시지고.”
서로의 빈 잔에 맥주를 따랐다. 그리고 잔을 들어서 부딪치며 서로의 승진을 축하했다. 단숨에 술잔을 비우고 내려놓은 홍성식이 유서연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유서연이 그의 시선을 의식하고 고개를 돌렸다.
“내 얼굴에 뭐 묻었어요!? 숙녀 얼굴을 왜 그렇게 봐요?”
“전에는 별로였는데, 오늘따라 서연씨가 예뻐 보이는데.”
“피 잇~! 취하지도 않았으면서 괜히, 술주정 하지 말아요.”
“남자한테 프러포즈도 못 받아 봤나봐.”
얼굴을 붉히는 유서연을 보고 홍성식이 능청스런 표정을 했다. 그런데 별안간 유서연이 두 주먹을 쥐고 홍성식의 어깨를 마구 두들겼다. 홍성식이 슬그머니 스커트 위로 들어난 유서연의 엉덩이를 쓰다듬은 것이다. 유서연이 홍성식을 노려보며 눈을 흘겼다.
“엉큼하게 어딜 만져요. 변태같이.”
“난 좋아서 그런데.”
“난 엉큼한 사람 싫어요. 매너 없이.”
“그럼 매너 있게 프러포즈할까!”
홍성식이 짓궂은 표정으로 유서연의 어깨를 껴안았다. 유서연이 홍성식을 떠밀며 다시 두 주먹을 휘둘렀다. 그들의 모습을 보고 모두들 한바탕 웃음을 터트렸다. 유서연은 홍성식이 능글맞게 다가오기는 했지만 과히 싫지 않으면서도 뽀로통하게 입술을 내밀었다. 홍성식이 눈을 질끈 감으면서 비트작전에서 부상당했던 팔을 붙들고 엄살을 했다.
“아이쿠! 구멍 뚫린 팔, 바람세겠네.”
“미, 미안해요. 그렇지만, 그런 식으로 프러포즈하는 남자를 어느 여자가 좋아해요.”
“하하하........!”
“호호.......!”
“그러다가 정말 둘이서 연애하겠네.”
모두들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송나희도 활짝 웃으면서 강미우를 흘깃 쳐다봤다. 이야기 방향이 바뀌어 언론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는 탤런트들의 사생활에 관한 대화가 시작됐다. 그리고 서로의 빈 잔을 채워주며 농담을 곁들인 흥겨운 분위기가 이어졌다.
술기운이 거나해진 전 과장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애들이 치킨을 사오라고해서 먼저 갈게. 술값은 내가 낼 테니 즐겁게 놀다가 와.”
“벌써 가시게요?”
“응, 난 취해서 들어가면 마누라한테 바가지 긁혀.”
“역시 과장님은 애처가이시네.”
전 과장의 뒤를 이어 유서연과 홍성식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도 이만 가봐야 해요.”
“나도 갈 건데.”
모두 일어서니 강민우와 송나희만이 남아 있을 수가 없었다. 그들도 따라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음식점 밖으로 나오니 술기운에 달아올랐던 온도 때문인지 그렇게 추운 날씨 같지가 않았다. 더욱이나 하늘에서는 눈송이가 떨어지고 있어 한결 훈훈한 기분이 들었다. 전 과장이 손을 흔들며 택시를 타고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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