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을 열고 바깥으로 향할 때 - 43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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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열고 바깥으로 향할 때 - 43
선영은 한걸음 물러섰다. 그에 따라 준석은 한걸음 선영에게 다가섰고, 그녀는 다시 한걸음 더 물러났다. 그러자 원룸 건물 벽에 그녀의 등이 닿았고 선영은 뒤돌아보진 않았지만 더 물러설 수 없는 막힌 곳임을 깨달았다. 선영은 당황했지만 준석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심적인 동요가 인다는 것은 상대방에게 자신감을 심어주는 촉매제나 마찬가지기에 그녀는 일부러 무덤덤한 눈으로 그를 마주보려 애썼다.
하지만 선영의 그런 노력은 사실상 애초부터 별 쓸모가 없는 것이었다. 준석은 상대가 어떻게 나오는가에 대해 인터랙티브한 행동 개시 등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는 이미 그런 단계를 뛰어넘어 자신의 행동만이 모든 걸 결정짓는다고 믿고 있었다.
“그… 러니까 선영아. 나랑 사귀면… 나는 프로게이머에 걸맞은 애인을 얻게 되는 거야. 너는 무슨 사정이 있어서 프로게이머 자리를 기피하는 거겠지? 하지만 너의 그 엄청난 실력으로… 나를 지도해주고 내 실력을 상승시켜주면… 나는 더욱 뛰어난 프로게이머가 될 수 있을 거야. 그렇게 하면 우리는 환상의 콤비가 될 거라고. 멋지지 않아?”
“나… 나는 그저…….”
“네가 날 후원해주는 거야. 그러니까 선영아! 나와 사귀어줘!”
선영은 질린 얼굴로 준석의 눈을 바라보았다. 사귀어달라는 상대의 의사를 물어보는 말투와는 달리 그의 어조나 눈빛은 이미 ‘다 사귀게 된 것’이나 마찬가지의 뉘앙스를 품고 있었다. 그것은 당연한 것이다. 준석은 결승이 끝난 대회장에서부터 여기까지 끈질기게 선영의 뒤를 몰래 밟으며 머릿속으로 ‘그녀와의 프로게이머 생활’이라는 상황을 이미 다 전개해놓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는 연을 끊다시피 한 본가에 연락을 해서 프로게이머가 됐다는 명목으로 새 거주지를 하나 마련해달라고 한 후 선영과 동거를 한다는 상상의 나래에 흠뻑 취해있었다.
“너한테도 좋을 거야. 게다가 나 이정도면 꽤 잘생긴 편 아니냐? 요즘 연습 때문에 배가 좀 나왔지만 그정도는 운동으로 얼마든지 뺄 수 있어. 네 미모에 전혀 위해될 게 없다는 거야. 네 미모… 선영의 미모…….”
한참 떠들던 그는 문득 웅얼거리며 두 눈에 광채를 띠었다. 아무도 없는 희미한 가로등 불빛 하에, 걸쳐진 야상 점퍼 안쪽으로 가슴골이 적잖게 드러나보이는 짧은 치마 원피스. 그것은 선영의 성적인 매력을 은근하면서도 짙게 함유하고 있었다. 그 밑으로 훤히 드러난 허벅지와 하이힐의 코디는 늘씬한 그녀의 몸매를 유혹적으로 발산해준다.
여자와의 접점이 거의 없다시피한 프로게이머 길을 걸어온 준석에게 있어선 눈앞의 고혹적인 선영이 솟구치는 욕망을 제어할 수 없도록 만들고 있었다. 그는 선영을 반드시 소유하고 말겠다는 뇌리 한쪽의 사명감 아닌 사명감에 휩싸여 그녀를 끌어안듯 다가갔다.
선영이 그가 무슨 짓을 할 것인지 깨달았을 때는 이미 등 뒤에 벽을 기대고 두 손목이 그의 손아귀에 붙들린 후였다. 그녀의 가방이 힘없이 툭하고 떨어졌다. 준석은 얼굴이 붉어져서 가뿐 숨결을 내뱉으며 선영의 몸에 밀착해갔다. 선영은 소리를 지르려 했으나 늘상 모든 치한들에 의한 보편적인 매커니즘처럼 경악에 의해 옭죄어진 심장이 그녀의 행동을 제한하고 있었다. 그리고 준석은 반항다운 반항도 못하는 연약한 ‘현재의 선영’에게 더욱 자신감을 얻고 행동을 점차 대담하게 넓혀갔다.
“선… 영아. 그냥 여기서 의식을 치르자.”
“의식이라니… 무슨……. 이거 놔… 놔.”
“우리가 하나가 되는 증거로서의 의식이야. 하아… 하아……. 여기 분위기도 좋잖아. 누가 오기 전에 얼른 끝내버리자고.”
“하나가 돼? 어… 야, 지… 지금 뭐하려는……!”
선영은 처음엔 자신의 한쪽 손목을 풀고 밑으로 떨어지는 그의 팔에 약간의 안도감을 얻었다가 곧 더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의 손은 바지주머니 속에 넣어져서 참지 못한 듯 ‘그것’을 문지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미 섹스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자각하게 된 선영은 남자의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기에 두려움에 물든 눈으로 준석의 행동을 지켜볼 뿐 말을 잇지 못했다.
얼굴이 확확 하고 달아오르진 않았다. 하지만 선영은 거의 맞닿듯이 밀착하여 흥분하는 그의 숨결에 불쾌하면서도 뜨거운 무언가가 가슴 속을 헤집는 느낌을 받았다. 잠깐, 지금 이 녀석 나를 범하려고 하는 거잖아. 빠져나가든지 소리를 지르든지, 하다 못해 몸부림이라도 쳐야 하는 것 아냐? 그런데… 왜 몸이 굳지? 이상한 일이다. 왜 몸이 굳어버리는 거지? 자신의 손에서 떨어뜨린 가방도 자각하지 못할 정도로 심한 정신적 공황에 휩싸인 선영은 꿈결처럼 다가오는 그의 안면을 보고도 아무런 제지조차 하지 못했다. 준석은 슬로우 모션처럼 느릿하게, 하지만 거리낌없이 선영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갔다.
차가운 밤바람이 새삼스럽게 피부를 훑어내는 현실로 정신이 돌아오게 된 건 선영이 아닌 준석 쪽이 먼저였다. 그녀의 한쪽 손목을 붙들고 벽에 밀고 있는 자신의 손목을 또 다른 누군가가 붙잡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강하게 그를 뒤쪽으로 밀쳐냈고, 단지 한쪽 손에만 그런 힘이 가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온몸을 쏠아내는 거센 기세를 내포하고 있었다. 준석은 그만 자세를 풀 틈도 없이 밀려나듯 몇 발자국 선영에게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너 뭐야?”
“누구…?”
비척비척 뒤로 물러나다 자세를 바로잡은 준석이 간신히 정신을 회귀했을 때 그의 눈에 보인 것은 선영 혼자가 아니었다. 그녀 옆에 또다른 그림자가 서있었고 조금 더 자세히 보자 그것이 남자라는 사실을 알아챘다. 준석 자신과 비슷해보이는, 아니 오히려 좀 더 왜소해보이는 몸뚱이었지만 방금 전에 자신을 밀어낸 걸로 보아 팔힘은 꽤나 셀 것으로 짐작했다. 아니면 뭔가 굉장히 분노한 것이 그를 그렇게 하도록 만들었거나.
“성진아…?”
문득 들려온 여신, 아니 선영의 목소리. 준석은 그녀가 이름을 부르고 있다는 점에서 서로 모르는 사이가 아니라는 점을 알아챘다. 성진은 선영을 막아선 채 그의 앞으로 두 걸음 정도 다가와 대번에 말했다.
“꺼져.”
순간 준석은 울컥했다. 그것은 그가 내내 착각 속에 벌이던 노력을 한순간에 무효화시킬 걸 지시하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뭐라고 말하려했을 때 그것은 목구멍속으로 다시 기어들어갔다. 똑바로 선 성진은 한 손을 코트 주머니에 찔러 넣고 있었지만 다른 쪽으로 내어진 손은 희미한 가로등 불빛에도 똑바로 보일 정도로 꽉 움켜쥐고 있었다. 여차하면 그 단단해보이는 주먹이 어느 만한 파괴력을 지니고 있을지 원하지 않는 검증을 얻을 것 같은 기분에 준석은 소리없이 침을 삼켰다.
그러나 준석은 왠지 모를 억울함을 느꼈다. 내가 그녀를 소유하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데! 게다가 이대로 돌아가면 감당 못할 정도로 엄청난 쪽팔림을 느낄 것 같았다. 그는 의미없이 돌아서진 않겠다는 다짐마냥 게슴츠레하던 눈을 똑바로 뜨고는 손을 번쩍 들어 성진 뒤를 가리키며 소리질렀다.
“야…! 은선영! 너… 너 남친 같은 거 없다고 했잖아! 그렇게 나… 날 유혹하고서는…!”
빠악-!
성진은 빼어들었던 손등으로 그의 옆얼굴을 강타했다. 흡사 손등으로 뺨을 후려치는 모습이었지만 주먹을 쥐고 있었기에 그 일격은 날카로웠고 그래서 준석은 정신이 흐릿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의 상체가 옆으로 고꾸라진다. 아찔한 아픔이 채 가시기도 전, 한숨을 쉬며 나지막하게 입을 여는 성진.
“…그냥 가라. 죽여버리기 전에.”
준석은 그제서야 볼을 감싸쥐고 비척비척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선영 쪽을 다시 바라볼 엄두도 못 낸 채 몇 번이고 넘어질 듯 달아나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성진. 소란이 잦아들자 그제서야 그는 원룸 건물 벽에 등을 기대고 있는 선영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심히 놀란 듯 미세하게 떨며 준석이 사라진 방향을 응시하고 있었다. 성진은 선영 곁으로 조심스레 다가가 그녀 옆에 떨어진 가방을 주워들었다.
“괜찮아?”
선영은 여전히 초점이 잘 맞지 않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가방을 탁하고 낚아채듯 받아들었다. 성진의 손가락이 한동안 허공에 갈 곳을 찾지 못한 듯 꼼지락거린다. 그는 그 손을 코드 주머니속에 넣고는 주변을 돌아보다 다시 선영을 보며 말했다.
“운 좋게 때마침 귀가하게 됐네. 아니, 근데 너는 이 시간까지 뭘 하다가 저 따위 녀석이랑 같이 집앞에 있게 된 거야? 어어? 옷은 또 그게 뭐야. 너 설마… 어제오늘 쟤랑 데이트하다 온 거야?”
선영은 입을 꾹 다문 채 그로부터 시선을 외면했다. 그리고 성진은 그런 그녀의 모습에서 함묵적인 대답을 얻었다고 착각하곤 기가 막혀 그녀와는 다른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얗게 얼어붙은 김이 긴 한숨과 함께 그의 입에서 빠져나온다.
잠시 후, 성진은 불편한 시선으로 달래듯 선영에게 말을 건넸다.
“야, 은선영. 내가 몇 번이고 주의를 주었잖아. 지금 네 외형은 평범한 20대 초반 여대생이고 네 미모에 혹해서 친절한 척 다가서는 남자들이 많을 거라고. 거 봐. 내 말을 무시한 결과가 어떤지를. 너 또 하마터면 끔찍한 일을 당할 뻔했잖아. 세상에는 여자를 단순히 성욕 도구로만 여기는 쓰레기 같은 인간들이…….”
그리고 성진은 언제나그랬듯 자신의 잔소리를 다 듣지도 않고 먼저 무시해버리는, 현재로서는 휙하고 몸을 돌려 들어가버리는 선영의 행동에 익숙한 한숨을 내쉬어야 했다. 왠지 오늘은 그 반응이 좀 더 빠른 것 같다. 계단을 올라가는 선영의 구둣발소리를 들으며 그렇게 생각하던 성진. 그리고 그녀에게 할당해준 원룸 보조 열쇠로 그녀가 문을 열고 들어갈 때까지도 성진은 코트 자락에 두 손을 찔러넣은 채로 건물 바깥에 서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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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영은 - 적어도 현재의 선영은 - 커피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성진은 커피포트에 물을 끓인 후 레몬홍차 티백이 담긴 컵과 커피가루가 담긴 컵에 각각 따르고는 티백의 컵을 선영에게 건넸다. 선영은 침대 사이드레일에 기대어 앉아 자신의 앞 좌식탁자에 놓여진 레몬홍차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평**면 김이라도 훅훅 불어볼 만하지만 오늘따라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 싱크대에 기대어선 채로 커피맛을 조금씩 음미하던 성진은 의아한 시선으로 선영을 내려다보다 툭하고 물었다.
“안 마셔?”
대답 없는 선영.
“식겠다. 얼른 마셔.”
여전히 대답이 없는 선영. 대신 그녀의 시선은 위로 향하여지며 서있는 성진을 올려다보았다. 성진은 커피컵을 쥔 채로 가만이 그런 선영을 마주 내려다보다 그녀가 앉은 탁자 맞은편에 앉았다. 성진은 문득 고개를 돌려 방 한구석에 내던지듯 걸쳐진 선영의 새 원피스를 보았다. 현재의 그녀는 가벼운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있었고, 성진은 시선을 더 돌려 현관쪽에 벗어진 그녀의 새 하이힐도 바라보았다.
“너나 마셔. 김성진.”
갑자기 그렇게 말하며 컵을 성진 쪽으로 쭉 밀어내는 선영. 성진은 고개를 바로 하여 자신의 가슴 앞으로 다가온 레몬홍차를 잠깐 내려다보곤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 그래? 너 좋아하는 거잖아?”
“비용 문제는 걱정하지 마. 네 카드 쓴 거 아니니까.”
잠시 그녀의 대답이 홍차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 짚어보던 성진은 그제서야 자신이 바라보았던 쇼핑물들을 떠올렸다. 하지만 비용 부담을 누가 했냐를 따지기에 앞서 성진은 후각으로 전해지는 익숙한 내음을 느끼고는 고개를 약간 앞으로 했다.
“너 술 마셨냐?”
“맥주 몇 잔 한 것뿐이야. 신경 쓰지 마.”
“맥주도 술이지. 게다가 술에 약한 네가 몇 모금도 아니고 몇 잔?”
“나 안 취했거든?”
“에라이. 가만 있어봐. 냉장고에 아키**가 있을 테니까.”
아키**는 현대의 숙취 해소에 탁월한 음료였고 선영도 그러한 광고를 몇 번 보았다. 하지만 선영은 별 관심 없다는 듯 고개를 푹 숙였다. 그녀의 이마가 홍차가 놓여졌던 탁자 위에 닿았고, 그렇게 졸 듯 앉아있는 선영을 뒤로한 채 성진은 냉장고를 뒤적거렸다.
분명 있을 것 같은데 없다. 녹색의 개봉하지 않은 아키**는 성진의 눈에 반갑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성진은 과일칸까지 샅샅이 뒤져보다가 확실히 없음을 인지하고는 짧은 한숨을 쉬었다. 편의점이라도 다녀와야 하나.
“이상하네. 예전에 사다 둔 게 없나?”
그 때 졸고 있는 줄만 알았던 선영이 툭하고 그를 불렀다.
“김성진.”
“왜?”
“너 요새 왜이리 늦게 와?”
“남이사.”
“외박도 자주 하더라?”
“네가 그렇게 말하니 꼭 내 와이프라도 된 것 같네, 하하. 가만 있어봐, 다른 숙취 해소할 만한 것이라도…. 그런데 왜 뜬금없이 그게 궁금한데?”
여전히 탁자 위에 고개를 숙인 채, 선영은 한결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행복한 것 같아서.”
냉장고 이곳저곳을 들춰보던 성진의 손이 멎었다. 그는 일어서서 선영을 돌아보았고 머리카락속에 파묻혀 자신을 바라보지 않는 그녀의 정수리가 비쳐졌다. 성진은 냉장고 문을 닫고 선영에게 되돌아 걸어갔다. 나지막한 그의 목소리가 원룸 안을 적막하게 감돌았다.
“그렇게 보여?”
“응.”
곧바로 나오는 대답. 성진은 조는 건지 말짱한 건지 알아볼 수 없는, 탁자 위에 고개를 숙인 선영을 내려다보았다. 문득 그는 선영과 자신의 사이가 소원해진 기분을 받았다. 늘상 집에 돌아오면 선영이 자고 있는 시각이었고, 설령 자고 있지 않더라도 게임만 하고 있었기에 둘은 별 말 없이 각자 간단히 씻고 자는 수순이었다. 아침도 누가 늘 먼저 나가나 싶을 뿐이지 서로 얼굴을 보거나 대화를 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언제부터 이렇게 됐을까? 혜진과 사귀기 시작한 이후부터? 하지만 성진은 혜진 탓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보다도 선영이 집에 얌전히 있음으로써 외부 위험 요소로부터 그녀 자신을 어느 정도 보호하고, 처신을 마땅하게 한다고 여겨졌을 때부터라고 생각했다. 성진은 한 손을 허리에 얹고는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려 소리없이 한숨을 쉬었다.
반면에 선영의 머릿속은 좀더 복잡한 내면에 사로잡혀있었다.
갑작스럽게 태어나서 성인의 자아를 갖게 된 자는 마치 가상현실의 게임이라도 하는 것처럼 별 생각 없이 주어진 역할을 수행한다. 선영의 경우도 처음에는 자신이 왜 존재하는지 모른 채 지내다가 어느 날 자신은 본래의 자신에 대한 ‘대행자’라는 것을 깨닫는다. 따라서 뭣도 모를 사명감으로 그 역할을 수행하면 끝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본래의 선영이 나오지 않는 시간이 길어짐에 따라 서서히 그녀는 자신의 인생 자체가 그녀 고유의 것이 되고 말았다. 현재의 선영은 이제 아무런 사명감 없이 자신의 인생을 살아야 한다. 그런데 그 인생이란 것이 아무런 행복도 의미도 찾을 수 없는 것이라면?
그냥 본래의 선영이 원하는 대로 죽는 편이 나으려나?
살고 싶어서 튀어나온 이면의 나인데?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너무 어렵다. 나더러 어쩌라고. 해답도 주어주지 않은 채 잠들 듯 무의식의 심연 속에 가라앉은 본래의 나여. 대답좀 해주라고.
나는 어떻게 해야 좋지?
“행복하지 않아.”
본래의 자신이 대답한 건 아니었다. 선영은 고개를 들어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성진은 여전히 어둠으로 칠해진 불투명한 창문으로 고개를 돌린 채 연이어서 투덜거리듯 말을 이어가고 있었다.
“이런 젠장할! 야, 은선영. 내가 행복한 것 같다고 했냐? 참 웃긴다. 누구 때문에 내가 이러고 있는데. 너한테 써버린 처음 병원비 아직도 못값아서 주말엔 팔이 뻐근해지도록 납품일 다녀야 하고. 네 식료비, 공과금, 개인 용돈, 핸드폰비, 옷값, 생리대값… 아 이건 빼자, 어쨌거나 기타 등등 한달 카드값이 얼마나 나오는지 모르지? 내가 어디 부잣집 자제로 보여? 본가에서 무슨 일 있냐고 수시로 연락 오는 걸 변명하느라 아주 진땀 쏙 빼고 있다고!”
멍한 표정으로 올려다보는 선영. 꽤 긴 말을 한번에 불평하듯 토해버린 성진은 약간 격해진 얼굴로 헉헉거리며 서있었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여전히 선영을 마주보고 있지 않았고, 선영은 그가 일부러 자신을 쳐다보지 않고 말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녀는 고개를 조금 내려서 성진의 종아리쯤 되는 높이를 응시하고 힘없이 웃었다.
“…미안해.”
“미안한 건 아냐?”
“내가 벌어서 갚을게. 나 때문에 쓸데없이 소모해버린 시간까지… 모두…….”
성진은 그제서야 선영을 내려다보며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물론 그녀가 갚겠다고 한 부분에서 혹한 건 아니다.
“말이라도 고맙군. 알았으면 얼른 양치하고 자라. 벌써 새벽 3시가 다돼가네. 기말고사 공부도 해야 하는데 시간도 없군, 쳇.”
그리고는 구석에 놓여진 가방으로 걸어가는 성진. 그는 가방을 뒤적여 프린트물을 찾다가 문득 손놀림을 멈추고 선영에게서 등을 돌린 채 덧붙이듯 말했다.
“본래의 네가 튀어나오는 것은 나름대로 해결방법을 찾아보려 애쓰고 있어. 다행이 그녀는 바로 다시 죽을 생각은 없어보이더군.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나와봤자 좋을 건 없으니까, 넌 몸가짐을 지금까지처럼 조심히 하도록 해.”
물론 구체적인 해결방법은 여전히 암흑의 장막 속처럼 보이지 않지만, 성진은 그렇게라도 일러둬서 안심시키는 편이 좋을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당사자인 선영은 그런 성진의 말을 듣다가 그가 모르는 사실 하나가 있음을 깨달았다. 창오빠와 자신이 알고 있는 중요한 것…. 깊은 새벽이 선사하는 고요 속에서 선영은 툭하고 입을 열었다.
“성진아. 저… 그게, 사실은 나…….”
다시 본래의 내가 나오면 반드시 죽게 되어있어. 본래의 그녀가 설정해놓은… 창오빠에게 맡긴 죽음의 의뢰. 그리고 그 말은 그대로 목구멍속으로 사그라져버렸다. 어물거리는 그녀의 말을 들었을 터인데 못들은 척 프린트물을 찾아보는 성진의 뒷모습을 바라보자 선영은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래, 나 때문에 그도 이면의 피해를 보게 되어버린 형국이니. 이 이상 얘기하는 것은 그를 더 불편하게 하는 꼴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선영은 그렇게 판단하고는 탁자 위로 시선을 옮겼다.
갖가지 상념이 그녀의 머릿속을 뒤얽듯 헤집고 다닌다. 그렇게 약 몇십초간을 꼼짝 않고 있던 선영은 이윽고 느릿하게 일어섰다. 간단히 프린트물을 훑어보기라도 하고 자려던 성진은 그녀의 행동에 다시 시선을 주었다. 살짝 비틀거리듯 그녀가 다가간 곳은….
“뭐야, 늦었잖아. 이 시간에 게임하려고?”
성진은 컴퓨터를 켜서 ‘카잔 전쟁’을 로딩시키는 선영의 모습을 보고는 뭐라고 언질을 주려다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나도 시험공부를 좀 해야 하니 이대로 불 켜진 채 놔두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프린트물로 시선을 옮기던 성진. 그리고 그는 거의 곧바로 침대 위에 몸을 던지듯 쓰러지는 선영에게 다시금 의문 섞인 시선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
성진은 그녀가 로딩시켰던 ‘카잔 전쟁’ net플레이 대기실 화면을 바라보았다. 게임 한판 하고 자려고 했지만 역시 몸이 버텨내질 못하던가? 물론 그러한 생각은 아주 잠깐에 지나지 않았다. 선영은 ‘카잔 전쟁’에서 친구 추가된 아이디의 접속 여부를 살펴보려 했었던 것이었고, 역시 이 시간엔 접속하지 않은 걸 확인하고는 그냥 잠자리에 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성진 또한 얼마 가지 않아 그런 사실을 알아챘다.
성진은 예전에 선영이 부주의로 끄지 않고 간 ‘카잔 전쟁’ net플레이 대기실에서 누군가와 나누었던 채팅 기록을 떠올렸다. 성진은 자리에서 일어서서 모니터를 주의 깊게 응시했다. ‘해신의창’이라 적힌 아이디가 역시 오프라인으로 표기되어있다. 성진은 침대 위에 등을 돌리고 누워있는 선영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해신의창’이란 아이디는 누구야?”
“…응, 어. 봤어, 성진아?”
“누구야?”
선영은 여전히 그에게서 돌아누운 채로 별 거 아니라는 듯이 대답했다.
“창오빠야.”
“창오빠가 누군데?”
성진은 자신도 모르게 언성이 살짝 높이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다음 말을 내뱉을 땐 자제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조금 후에 다시 선영의 무덤덤한 대답이 들려왔다.
“내 전 애인.”
성진은 미묘한 기분에 휩싸였을 뿐, 별달리 할 말을 찾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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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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