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을 열고 바깥으로 향할 때 - 33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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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열고 바깥으로 향할 때 - 33







성진은 차라리 별 거 아닌 전화에 짜증을 내는 편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핸드폰 너머에서 다급한 목소리로 허둥지둥 말하는 동혁의 목소리는 그로 하여금 불안감을 증폭시키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재킷만 걸친 채 클럽 바깥까지 나와 통화 내용에 집중하는 그의 얼굴은 핏기가 싹 사라져있었고, 문지기는 그런 그의 안색을 흘끗거리며 살펴보는 중이었다. 차가운 새벽 늦가을바람이 겉옷만 대충 걸친 그의 몸을 훑고 지나갔지만 성진은 추위조차도 못 느끼는 것 같았다.



동혁의 물음이 다시금 그에게 전해졌다.



- 그래서, 너한테도 연락이 안 갔다는 말이지? -



“그래, 그리고 난 지금 바깥이라 선영이 집에 왔는지도 알 수 없어.”



벌써 몇 번째 같은 내용을 묻고 있는진 몰랐지만 성진 또한 그 부분을 지적할 여력이 없었기에 이전과 똑같이 대답했다. 하지만 시간이 어느 정도 해결해주는 부분은 존재하기 마련이었고, 그래서 성진은 보다 디테일적인 대답을 창출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열쇠는 나한테 있으니까 집에 왔다면 내게 연락했겠지. 그런데 연락이 없는 걸 보면 집에 왔을 것 같지도 않아.”



- 이런 젠장할… 도대체 어디로 간 거지? 걔 가방도 보이지 않아. 모두 잠든 사이에 펜션을 아예 나가버린 거 같은데…. 여긴 택시도 잘 없다고. 대체 어디로… -



“너 취한 건 아니지?”



- 안 취했어! 임마. 걔가 취했지. 아, 그러고 보니 내가 필름 끊기기 전 걔가 날 손날로… -



“안 취했는데 필름이 끊겨? 손날은 또 뭐야?”



- 아, 아무튼! 대체 어디로, 어디로…… -



성진은 이젠 횡설수설인 동혁의 통화 내용을 들으며 한숨을 쉬었다. 이 녀석 취한 거 맞구만. 그리고 그는 특별히 주의해서 선영을 봐주라는 부탁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점에 있어서 질타를 하지는 않았다. 어디까지나 부탁이었지, 그의 즐거움까지 뺏아가면서 수행할 의무는 동혁의 입장에선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물론 그가 선영을 범했다는 점이 드러나면 얘기는 달라졌겠지만, 아직 그 부분까지 전혀 짐작하지 못하는 단계인 성진은 일단 무의미한 통화는 이쯤에서 끊기로 했다. 그는 자신도 집으로 가서 확인할 테니 동혁에게 계속해서 찾아보라는 말만 남기고 핸드폰을 닫았다. 어둠 속으로 내뻗어진 한숨에 의해 입김이 피어오르는 것을 바라본 그는 잠시 후, 휙하고 몸을 돌려 지하에 위치한 클럽 내부로 다시 들어갔다.



“선배. 무슨 일 있어요? 표정이 왜 그래요?”



성진이 오면 또 할지 어떨지를 잘 몰랐기에 미선은 옷가지들을 입지 않고 안은 채 소파에 앉아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성진의 얼굴에서 딴 생각에 잠겨있는 생경함을 발견하고는 질문했다. 하지만 성진은 대답할 생각도 못했고, 그녀 옆에 앉아있는 소희까지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는 것을 자각해서야 정신을 차리듯 말했다.



“어? 어… 미안. 미선아. 급히 가봐야겠다.”



“지금요? 같이 가요, 선배.”



“이 시간에? 참… 성진, 어지간히도 바쁜 몸인가 보군.”



소희는 아쉬운 입맛을 다시기라도 하듯 와인잔을 기울이며 드러난 한쪽 눈으로 성진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성진은 설명을 삼키는 표정으로 미소만 지으며 그녀에게 손을 들어보였고, 소희는 별 말 없이 벗은 다리를 꼬아앉아 그에게서 시선을 떼었다. 그녀는 그 무릎 위에 팔을 받치고는 턱을 괴어서 와인잔을 내려놓은 손으로 이번엔 자신의 팬티를 집어들어 검지에 걸었다. 그리고는 마치 그것을 가지고 장난이라도 하듯 빙글빙글 돌렸다.



그 모습에 성진은 잠시 인사를 건넬까 하다가 그냥 넘어가는 편이 낫겠다 판단하곤, 옷을 추슬러 입은 미선의 손을 붙잡았다. 그리고는 홀 바깥을 향해 조금 빠른 발걸음을 내디뎠다. 소희는 그런 그들의 뒷모습을 흘끗 쳐다보곤 팬티를 이번엔 손목에 걸고는 다시 와인잔을 들어올려 입가에 갖다댔다. 약간 붉은빛을 띠는 주황색의 와인이 그녀의 목으로 살포시 흘러들어간다.



그리고 소희는 그 느낌을 하나의 생각에 섞어서 내기라도 하듯 중얼거렸다. 섹시하고 적극적이지만 동시에 예리하기도 한 그녀.



“친한 후배란 강조, 야심한 시각의 뜬금없는 연락, 미소지을 여력은 있으나 생각은 딴 곳으로.”



슬쩍 핏하고 힘없는 웃음을 내뱉는 소희.



“또 다른 여자 문제군. 그가 진심으로 생각하는.”



“어라, 그냥 가도록 놔둔 거야?”



긴 머리를 웨이브로 늘어뜨린 하영이 역시 환상적인 몸매를 자랑이라도 하듯 가슴과 하반신만 대충 가린 차림으로 그녀 옆에 다가왔다. 하지만 소희는 와인의 맛을 음미하기라도 하듯 그녀 쪽은 바라보지도 않고 있었다. 대답조차 없는 친구의 모습에 하영은 툴툴거리며 과일안주를 몇 조각 우적거렸다. 그리고는 자신도 빈 와인잔을 하나 집어들었고, 그 때쯤 소희는 여전히 하영을 보지도 않은 채 지나가는 물음을 던졌다.



“화장실에서 이제 끝난 거야?”



“끝나긴 예전에 끝났지, 이 가스나야. 여기 분위기 보고 바로 안 오고 파트너랑 멀찍이서 수다나 떨면서 기껏 시간 끌다 왔구만. 아니, 근데 너 쟤 좋아하지 않았어? 아무리 귀여워보이는 애가 옆에 있다지만….”



“시끄러워. 그 얘긴 그만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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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환은 자려고 누웠던 몸을 다시 일으켜서 컴퓨터를 켜야 하는 상황이 온 것에 대해 전혀 불평하지 않았다. 그리고 사실 이와 같은 연락이라면 더 열악한 상황이 닥치더라도 짜증 한번 내지 않았을 것이다. 핸드폰에 발신자 표시 제한으로 걸려온 본래의 선영 목소리는 그만큼 그에게 엄청난 파장이었다. 태환은 컴퓨터가 부팅되는 동안에도 의자에 앉은 채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착각을 해보았다.



곧 윈도우 화면으로 진입한 모니터에서 태환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하나의 아이콘을 더블클릭했다. 전략 시뮬레이션 ‘카잔 전쟁’의 바로가기. 그리고 이젠 선영과의 전용 채팅처럼 돼버린 net플레이 대기실에서 그는 선영의 접속 상태를 흘끗 확인하고는 귓속말을 전달했다.



「너… 너 선영 맞지? 예전의…」



「그래」



비단 디지털 문자가 아니더라도 느낄 수 있을 것 같은 담담하고 짧은 대답. 그리고 태환은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얘기를 나누지 못해 안달난 사람처럼 달려들었다가 정작 채팅을 입력하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뭐라고 얘기를 건네야 하지? 아니, 뭐부터 얘기를 건네야 하지? 아니, 아니, 건넬 수 있는 얘기가 뭐지?



이런 젠장할! 아무리 방구석에만 처박혀 온 나라도, 현실의 누군가와 대화를 해본 지 오래인 나라도 온라인으로까진 이렇지 않았잖아? 게다가 상대는 네 목소리가 닿지 않는다고 그렇게도 안타까워하던 그녀의 실체잖아? 이런 상황에서 왜 그렇게 망설이고 있어? 태환이 키보드 자판 위에 손가락들을 놓은 채 한참을 갈팡질팡하는 동안 보다못한 듯 선영의 귓속말이 먼저 화면에 떴다.



「오래간만이야, 태환 오빠」



‘창오빠’라거나 닉네임이 아닌 본명으로 대화를 건네는 그녀의 모습에 태환은 다시 한번 본래의 선영이 돌아왔다는 실감이 들었다. 물론 대행하던 그녀하고만 대화를 한 지도 얼마 지나진 않았지만, 그간의 답답함을 돌이켜본다면 태환에게 있어 체감상으론 상당한 시간이 흐른 듯한 느낌이었다.



「오랜만이군. 선영아」



형식적인 답변. 그리고 다시 끊긴 대화. 하지만 이번에 태환은 이렇게 대화를 진전시키지 못하는 이유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와 나는 이미 끊어진 인연이나 마찬가지이기에. 헤어진 연인은 비단 2년이란 공백기간뿐만이 아니라 수년, 혹은 그 이상의 시간이 흘러도 대화는 가라앉기 마련이다. 혹 열성이 좀 지나치다 싶은 수다쟁이라도 겉으로의 분위기만 띄워줄 뿐 교감을 하지 못한다.



태환은 또다시 한참이란 시간 후 겨우 대화를 진행시킬만한 타이핑을 했다. 그리고 그것은 보편적인 재회의 자리에서 참으로 어울리지 않을 법한 무게감을 담고 있었다.



「이전 선영에게 들었어. …죽을 생각이야?」



「그래」



「하하, 그럼 이 게임 채팅창으로 접속한 이유는 내게 남길 유언이라고 봐도 무방하겠군」



「그래」



내용과는 달리 ‘우리 점심 뭐 먹을까?’, ‘간단히 분식집에서 때우지 뭐’와 별 다를 바 없는 분위기 같다고 생각하던 태환은 그만 실소해버렸다. 하지만 그와는 반대로 키보드 위에 얹은 손가락들은 미묘하게 떨리고 있었다. 이어서 그가 뭐라고 입력하려던 찰나 선영의 메시지가 먼저 떴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아니야. 펜션에서 끝내지 않고 귀찮음을 무릅쓴 채 이 PC방까지 찾아와서 내가 여기 접속한 이유는, 내가 목적하는 바를 채워줄 가장 만만한 누군가가 생각났기 때문이야」



그 누군가가 나겠고, 목적하는 바는 무엇이지… 라고 생각하던 태환은 문득 ‘펜션’이란 단어에 이 상황의 위화감을 깨달아버렸다. 그는 경악하듯 재빨리 타이핑을 했다.



「그… 그러고 보니 선영. 너 엠티 갔다고 했지? 설마 본래의 네가 튀어나온 게…」



「멍청한 녀석이 친구도 꼭 쓰레기 같은 녀석을 데리고 있어서 말이지」



멍청한 녀석이 누구고 쓰레기 같은 친구가 누군지를 얼른 생각해낼 수 없었던 태환은 일단 그 점은 차치하기로 했다. 그는 계속해서 채팅귓속말로 물어보았다.



「대행하던 선영에게서 들었어. 본래의 네가 나올 상황에 대해. 그럼 넌… 그러니까… 그런 걸 당한 거야?」



「강간당했냐고?」



「어? 어… 말하자면 그렇지만……」



「빙빙 돌려 말할 필요 없어. 난 어차피 죽은 거라 생각해. 그래. 대행하던 녀석이 술처먹고 자빠지자 범해진 거지」



하지만 태환은 그녀가 그 후에 본론을 말할 것임을 짐작하고서도 먼저 타이핑을 했다. 그리고 그것은 선영마저도 잠시 주춤하게 만들 한마디였다.



「괜찮니?」



「……뭐가?」



「아니, 괜찮을 리가 없지. 바로 옆에 있으면 뺨맞아도 할 말 없구만. 미안하다. 선영아. 오빠가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



잠시 응답이 오지 않았다. 하지만 태환은 직감으로 그녀가 어이가없어서 이러고 있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은 ‘꽤’라고 표현할만한 시간이 지나고 나서 띄워진 말로 증명되었다.



「하나 언급하고 넘어가지. 나는 지금 오빠의 그 뜨뜻미지근한 위로를 들으려고 접속한 게 아니야. 오빠와 나는 경멸이란 감정에 의해 헤어진 사이가 아니었을지언정,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태환은 그녀의 이 말엔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 한구석이 따스해지는 기분마저 받을 정도였다. 여전히 디지털 문자로 오고가고 있었지만 그녀의 그 말에 담긴 분위기는 어쩐지 싫지 않음을 내비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확실히 그녀와 나는 꽤 잘 맞는 사이이긴 했어…. 세월이 지나도 이런 부분을 캐치할 수 있다는 건.



그리고 태환은 동시에 쓸쓸한 긴장감을 갖추어야 했다. 선영은 빈틈을 거의 두지 않는 여자이기 때문이다. 잠시의 시간을 두고 그녀의 건조한 본론이 채팅창을 메워가기 시작했다.



「난 다시 무의식의 심연 속으로 사라진다. 이 채팅이 끝나고 녀석의 원룸으로 가자마자 대행하는 녀석을 올려낼 거야. 섹스 후 내가 끌어올려지는 건 현 상황으론 해결할 방법이 없군. 후에 강제로라도 다시 범해지거나 행해질 경우엔 또 나오게 되겠지만 별로 좋은 효과는 없을 거야. 이번엔 어찌하다 보니 죽을 수 없었지만 앞으로도 그럴 거란 보장은 없지. 그리고 말야」



‘다른 방법이라도 생각해보자’라고 입력하고 싶은 감정을 간신히 추스르며 태환은 타이핑을 멈춘 상태로 그녀의 말을 ‘보고’만 있었다. 귀가 아닌 눈으로 정보를 받아들이는 현상이 많아진 현대 시대이지만, 그녀의 말은 어째서인지 디지털 문자마저도 감히 끼어들 수 없는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어질 말을 암시하는 ‘그리고 말야’라는 부분이 태환의 머리 한구석을 거슬리게 긁어대는 것 같았다.



「죽은 거나 마찬가지인 저 심연 속에서 살아있는 현실로 자꾸 스위칭하듯 왔다갔다하다 보니 이상한 변화가 생기는군」



‘이상한 변화?’



잠시 동안 채팅귓속말이 올라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끈기 있게 말없이 계속 채팅창만 응시했고, 조바심이 날쯤에 선영은 느릿하게 말을 띄웠다. 꽤 고민한 흔적.



「이것 또한 별로 좋은 건 아닌 것 같아. 뭐랄까. 보통 인간이 경험하지 못할 부분을 설명하려니 언어의 한계성이 느껴지지만… 굳이 말로 얘기를 해보자면 벽 속에 끼어있는 기분이야」



태환은 문득 팔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죽고 사는 건 사실 차원의 문제지. 나는 문을 열고 바깥으로 향할 때란 표현을 자주 쓰지만 생사라는 건 신이나 악마 같은 이들이 아닌 이상 장난처럼 조정할 수 있는 게 아니거든. 하지만 나는 그럴 권리가 없는 인간의 입장에서 자의든 타의든 그렇게 되고 있다. 웃기게도 난 요 한달 내에 세 번을 죽고 살아났어. 그러다 보니 느끼게… 오감으로 인지할 수 있는 게 아닌 설명할 수 없는, 아무튼 나한테 ‘전해져’오는 일종의 위치야. 나는 생과 사를 나누는 벽 속에 끼어서 점차 굳어가고 있는 것 같아. 이러다가……」



태환은 상대가 자신을 볼 수는 없겠지만 자신의 표정 또한 매우 이상하게 일그러져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죽지도 못하는 상태로 이 공간에 갇혀버릴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



채칵…. 채칵….



한동안 태환은 그녀가 ‘위치’했다던 공간을 탐험하는 것처럼 머릿속이 비었다가 문득 시계바늘 소리에 현실감각이 돌아옴을 자각했다. 그는 자신의 방에 놓인 탁상시계로부터 ‘시간을 확인’하는 목적이 아닌 다른 방면으로도 도움을 받은 기이한 경험을 했다는 것을 깨닫고는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그가 간신히 심경을 진정시킬 때쯤.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는 그녀의 채팅귓속말이 무덤덤하게 올라온다.



「그다지 유쾌한 감각은 아닐 것 같군」



태환은 실제로 이를 악물듯 용기를 내었다. 이건 정말 장난이 아니라고 뼛속까지 자신을 다잡으면서. 그는 바짝 긴장한 손가락들로 하나하나 조심스레 타이핑을 했다.



「선영아」



「……」



「나는 그냥 살아가라고 네게 얘기하진 않겠어. 자신을 가장 잘 이해해줄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그 자신에게 한정되어 있고, 특히 너는 더 그럴 테니까. 그러나 자신은 약하기 마련이고, 네 자신도 그런 면으로는 보통 사람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버티지 못하겠지. 특출한 머리는 엄청난 능력을 발휘하지만 그만큼 자신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 또한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고독해지고 그래서 자살이란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고 생각하고 있어」



「오빠가 생각하는 걸 부정하진 않겠지만 극히 피상적인 부분에 지나지 않아. 그러니까 역겨운 서론 그만두고 본론이나 얘기해」



「…굳이 나한테 연락한 이유이기도 하겠지. 구체적인 건… 내가 직접 말할 수는 없겠군」



서론을 잡아둔 후 본론을 얘기할 수 없다는 것은 꽤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으나 선영은 ‘장난하냐?’따위로 말을 건네지는 않았다. 그저 침묵. 그리고 태환은 그런 사실이 자신이 추측하는 바가 들어맞게 되는, 아주 비고무적인 정답을 맞춘 거라 생각하며 어금니를 깨물었다. 그렇다. 그녀가 곧바로 무의식의 심연 속으로 사라지지 않고 이렇게 PC방으로 가서 내게 말을 거는 이유를.



선영은 어쩐지 부드러운 어투로 채팅귓속말을 전달했다.



「역시 태환 오빠야. 그나마 내 생각을 잘 읽고 있어」



「네 전 애인이었다면 이 정도는 돼야지」



「내 입에서 ‘오빠는 애인이라고 하기엔 어딘가 부족해!’라고 외치지 않고서는 못견딜 상황을 만든 건 오빠 자신이야. 너무 쓸데없이 진지하거든. 게다가 무슨 남자가 그렇게 보수적이야? 여자가 해달라고 해도 끝내 삽입하지 않고 손만 잡고 잤잖아?」



「정확히는 끌어안고 잤지」



「못말려, 정말」



「어어, 이것 봐. 손만 잡고 자는 거랑, 뒤에서 끌어안고 자는 거랑은 아주 많은 차이가 있다?」



「다른 여자 같으면 오빠 거기에 무슨 문제 있는 거냐고 의심하고도 남았어. 나니까 그냥 이해하고 넘어갔지. 이건 무슨 희대의 순결 소울메이트도 아니고」



태환은 현 상황의 입지만 아니면 고개를 꺾으며 한바탕 웃어제끼고 싶었으나 역시 마음놓고 웃을 수가 없었다. 미소는 지어졌으나 다신 없을 것 같은 씁쓸함. 그것은 그 자신도 인지할 정도였고, 그래서 자꾸만 대화를 다른 방향으로 이끌어 도망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선영은 그렇게 놔두지 않겠다는 듯 툭하고, 쓸쓸함이 베인 귓속말 하나를 띄워올렸다.



「그래. 뭐 그래도 나는 어쩌면 오빠 같은 사람을 만나서, 인생이라 하기에 염증이 일 정도의 삶에서 그나마 마음의 휴식처가 되었는지도 몰라. 소울메이트라… 환상 속의 이성이 연상될 정도로 낭만이 스며있는 지칭이지. 하지만 현실에 진정한 그런 것 따윈 존재하지 않는 것 정도는 알고 있어」



‘더군다나 김성진 같은 녀석은… 내가 무엇 때문에 내 몸이 좋아서 죽게 내버려두지 않겠다는 답변 정도밖에 못하는 녀석에게 흔들리고 있는진 모르겠지만….’



치이잉-.



인터넷 회선을 타고서 상대방에게 전달되어진 텍스트는 ‘존재하지 않는 것 정도는 알고 있어’의 선에서 끝났고, 성진에 관련된 얘기는 그녀의 머릿속에서 맴도는 정도에 그쳤다. 늦가을의 밤은 깊었고, 아직 밝아오는 새벽의 기운이라곤 한 점도 느껴지지 않는 시각의 PC방은 적막 그 자체이다. 간간히 들려오는 게임 플레이 사운드만이 한 귀를 통해 흘러오고 지나갈 뿐.



그리고 모니터를 바라보는 선영의 눈동자는 다시금 죽은 빛이 감돌았다. 시간을 더 끌 수는 없다는 의미. 하지만 그 눈동자에는 처음의 의도를 번복하지 않겠다는 힘이 실려있었고, 상대방이 자신의 요구를 들어줄 정도의 존재라는 것을 자각하고 있었기에 그녀의 손가락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선영은 먼저 평범하리만큼 헤어짐의 뉘앙스를 담은 채팅을 전달했다.



「난 이제 가야 해」



대답은 없었다. 그리고 선영은 그 사실에 별 신경을 쓰지 않았고 이어서 조금 빠르게 다음 전달 메시지를 타이핑해갔다.



「중간 설명의 필요가 없어서 좋군. 다음에 또 내가 현실로 끌어올려지면 오빠한테 위치를 전송해 줄게」



보이진 않았지만 선영은 상대가 경직되어 있다는 것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다. 황당할 것이다. 그러나 짐작된 황당함일 것이다. 그 의미를 애초부터 알고 있을 것이기에. 단지 머릿속으로는 짐작하지만 아직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진 완전히 인정할 수 없는 그 무엇. 그리고 선영은 상대를 배려한다는 차원에서 불필요하게 늘어뜨리거나 어물쩡거리지 않는, 인정사정 없는 여자였다.



「나이프가 가장 만만할 거야. 물론 후에 오빠한테 어떤 위해가 가해질지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 누구의 시선도 닿지 않는 장소는 내가 면밀히 고를 수 있으니까」



뭐 태환 오빠 정도면 내가 바라는 것을 아주 성실하게 수행해줄 것이야.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 악마의 미소 같은 걸 지어보이면 어울리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해보며 - 연이은 타이핑이 끝나자 엔터 키를 간결하리만큼 탁하고 눌렀다.



「오빠만이 해줄 수 있는 거야. 내가 벽 속에 끼어 죽지도 못하는 상황을 방지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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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이어집니다.

오랜만에 와도 늘 반겨주는 분들이 있어 감사할 따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언제 또 기약없이 끊겨도 그러려니 해주시기 바랍니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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