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을 열고 바깥으로 향할 때 - 55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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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열고 바깥으로 향할 때 - 55







「첫사랑? 아하하. 웃기지 마, 창오빠. 김성진과 나와의 관계는 그렇게 낯뜨거운 단어가 적용될 만한 계제가 없어」



「그럴지도」



이렇다. 창오빠는 늘 이렇게 미적지근하다. 뭔가 자극적인 논란거리나 반발거리가 엿보인다 해도 자신의 의견이 100% 맞다는 전제를 깔아놓지 않는다. 상대방 의견도 맞을 수 있다는 식으로 간단히 무마시키기 때문에 맥이 탁 풀린다. 그래서 선영은 괜히 짜증거리를 발산할 곳을 찾지 못해 자신의 입지를 더욱 확고히 굳히는 발언을 했다.



타이핑된 디지털 문자는 감정이입을 싣고 대화상대인 태환에게 거리의 개념을 없애는 듯한 속도로 전달되었다.



「저번에도 말했지만 나는 그를 좋아하는지 어떤 감정인지조차 몰라. 그래, 신경 쓰인다는 점은 인정하겠어. 하지만 첫사랑이란 말은 오버야. 그렇잖아? 내 감정이 단순히 감사하고 미안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는데. 게다가 상대인 김성진도 날 귀찮은 녀석 그 이상 이하로도 보고 있지 않아. 예전의 나라면 모를까」



태환은 성진이 그녀를 단순히 귀찮은 존재로 인식한다고 못박는 선영의 발언에는 딴지를 걸지 않기로 했다. 그보다는 선영과 얘기하면 얘기할수록 그 김성진이란 녀석을 한번 만나서 자초지종을 직접 듣고 싶다는 생각이 새록새록 들었다. 물론 히키코모리에 걸려있는 자신의 현 상태가 그것을 쉽게 실현으로 옮기진 못하게 하고 있었지만.



잠시 사이를 두고 태환은 느릿하게 타이핑을 했다.



「그런데 넌 지금 성진의 컴퓨터를 쓰고 있는 것 아니니?」



「쓰고 있는 것은 인정해. 하지만 이것도 첫사랑과는 별개의 문제야」



「아니, 동거를 하고 있다면 우리가 지금 성진에 대해 얘기를 하는걸 뒤에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지. 분명 이상하게 생각할 텐데, 그런 것 상관없이 이렇게 자유자재로 얘기해도 되는가를 물으려는 거야」



태환은 첫사랑이란 단어에 상당히 민감해진 그녀의 메시지를 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런 걸 보면 분명 ‘그냥’ 신경 쓰고 있는 것 같지는 않은데… 하지만 이 이상 더 캐내려는 시도를 해봤자 좋을 건 없지. 태환은 이제부턴 괜히 그런 단어를 꺼내서 그녀를 자극시키면 안되겠다 다짐하였다.



어쩐지 태환은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완전히 ‘차가운’ 본래의 선영보다는 이쪽이 그래도 좀 더 여자다워 보인달까. 그리고 아까처럼 약간 민망해졌는지 그녀의 대답은 조금 늦게 띄워올려졌다.



「그런 건 신경 쓸 필요 없어. 성진은 지금 자기 애인이랑 여행을 갔으니까. 적어도 며칠 간은 집에 없을 거야」



애인이랑? 이것도 선영이 확실히 알아보고 애인이란 표현을 쓰는 걸까. 어쨌거나 다른 여자랑 수 일 동안 여행을 갈 정도면 선영이 ‘김성진이 자신에게 갖는 감정에 대해 얘기한 것’은 사실일 가능성이 높겠군. 그다지 좋지는 않은데….



「그런데 창오빠」



「음?」



「오빠는 날 어떻게 생각해?」



태환은 잠시 김성진에 대한 생각을 접어두고 그녀의 채팅에 집중했다.



「어떻게 생각하냐니?」



「그러니까… 오빠는 본래의 나의 전 남자친구였잖아. 그러니까 지금 새롭게 나온 나는 어떻게 생각하냐고」



「너는 너야」



「전혀 이성으로 보이지 않는 거야?」



태환은 담배를 비벼 끄곤 긴 한숨을 쉬었다. 이걸 어떻게 대답해야 하나…. 일단은 딱딱한 반문으로 대응해보자. 태환은 역시 이번에도 느릿하게 키보드 자판을 두드려갔다.



「그렇게 물어보는 의미가 뭐지?」



「오빠는 지금까지 계속 나를 걱정해주고 있잖아. 그리고 일시적일지는 모르지만 안전한 거주지까지 보장해주고, ‘카잔 전쟁’에 관련해서도 내 경기를 살펴보며 상당한 조언을 해주잖아. 그럼 날 좋아해서 그러는 거 아냐? 아니, 이것도 좀 더 명확히 하자. 날 좋아해보고 이성친구로서 다시 시작하고 싶은 감정에서 비롯되는 거 아냐?」



「그렇다고 한다면?」



반문에 반문. 하지만 어색한 진행은 아니군. 태환은 컴퓨터 책상 위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며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고, 꽤 긴 시간이 지나서야 선영의 메시지는 띄워올려졌다. 고민한 흔적이 역력한 메시지.



「그럼… 난 상관없어. 난 오빠에게 기대고 오빠와 함께 진지한 사랑이란 게 뭔지를 한번 경험해보고 싶어」



「……」



태환은 턱을 만지작거렸다. 그렇게만 되면 참으로 이 얼마나 고무적인 현상일까. 하지만…….



태환은 이번엔 오히려 약간 빠르게 타이핑을 했다.



「그럴 순 없어, 선영아」



「……왜지?」



「내가 상관 있으니까」



조금 잔인한가? 하지만 어쩔 수 없다. 그리고 선영은 얼마간 사이를 두고 똑같은 메시지를 한번 더 띄워올렸다.



「……왜지?」



「나는 예전에 이미 본래의 너랑 관계를 정리했던 사이거든. 비록 현재의 너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겠지만… 외모는 변하지 않은 데다, 현재의 너라도 본래의 너를 내면 속에 간직하고 있는 존재니까」



「그게 중요해? 헤어진 연인끼리 다시 만나서 잘되는 경우도 있잖아. 하물며 내 기억이 완전히 리셋됐는데, 오빠한테는 더 잘된 일 아냐?」



이 녀석, 내 성격을 잘 모르는군. 태환은 담배를 새로 하나 꺼내서 입에 물고는 불을 붙이기 전에 한번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 보니 직감적으로 느끼고 생각할 때는 쉬워보였는데, 언어로 풀어내려니 어렵기 그지없군. 담배에 불을 붙인 태환은 연기를 짙게 내뱉으며 키보드 위의 손가락을 놀려갔다. 어쩐지 그녀와 이렇게 대화할 때는 더 많은 담배를 피우게 되는 것 같다고 생각을 하면서.



「한번 헤어진 연인이 다시 시작하기란 쉬운 게 아니야, 선영아. 더군다나 그녀와 나는… 순간적인 트러블 같은 게 일어서 헤어진 게 아니라 성격 차이를 극복하지 못했다. 나는 그녀를 이해해보려고 했지만 이해할 수 없었고, 그녀는 이해하지도 못하는 주제에 늘 다정하게 깔보는 듯한 태도를 취한다고 지긋지긋해했었지. 그 와중에 나는 입사한지 얼마 안된 회사에서 해고당하고 그녀는 그녀 나름대로 보통 사람들의 뇌에서는 나오지 않는 정신적인 압박에 시달리기 일쑤였어. 차라리 경멸이란 감정으로 헤어졌으면, 다신 그러지 않겠다고 약속하며 돌아올 수는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건 그런 게 아냐. 너무 여러 부분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어」



「난 오빠의 성격에 신경 쓰지 않아. 난 본래의 나와는 완전히 다르다고. 나는 정신적인 혼란도 없어. 설령 시간이 경과하며 그런 부분이 나에게 닥친다고 해도, 난 오빠를 위해 극복할 거야」



「선영아」



「나를 사랑해! 그리고 나도 사랑하게 해줘!」



태환은 갑자기 막무가내로 변한 선영의 메시지를 단조로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어쩐지 그 메시지에는 울먹이는 감정이 담겨있는 것 같았다. 태환은 다시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한 손을 들어 눈가를 살며시 가렸다. 그녀에게 감정을 주려 하지 않으려고 다짐했지만, 여전히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현재의 선영도 이렇게 힘들어하고 있는데… 역시 그녀의 말대로 할 수는 없는 상황, 그러도록 허용하지 않는 자신.



한참 후 태환은 마지못해서 채팅을 하는 사람처럼 힘없이 키보드 자판을 두드려갔다.



「선영아. 나는 너를 정말로 좋아해. 하지만 그 이상으로 발전시킬 수는 없어. 왜 사람들이 가슴 아파하면서도 좋은 친구로 지내자고 선을 긋는지 알 것 같군. 그래서 그 점은 정말로 미안하게 생각해. 특히 아무것도 모르고 나와있는 현재의 너에게는 더」



「……」



「하지만 난 너를 위해 웬만한 일을 모두 감수할 거야. 물질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내가 도울 수 있는 것이면 뭐든 다 할게. 하지만 나를 사랑하려곤 하지 마. 너와 나는… 그저 특별한 관계 그 이상 이하로도 변화시키지 않고 유지하는 게 최선이야」



「특별한 관계…」



선영은 그런 지칭이 너무도 낯설고 허무하게 느껴진다는 듯 그 한마디만 띄웠다. 태환은 뭐라 더 얘기를 진행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손가락만 키보드 위에 올린 채, 하릴없이 담배만 피워갔다.



누군가 보면 한쪽이 접속이라도 끊었나 생각이 들만큼 오랜 시간 아무 메시지가 올라오지 않았다. 하지만 태환은 그녀가 여전히 모니터 앞에 있을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단지 생각을 하는 거겠지. 경험하지 못한, 그리고 경험한다 해도 인정하기 힘든 이 어려운 상황을.



이윽고 선영은 마치 울먹임을 간신히 진정시킨 사람처럼 덤덤하게 메시지를 띄워 올렸다. 태환이 담배를 비벼 끄고도 한참이 지난 시점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어쩐지 현실에 조소를 보내는 뉘앙스를 담고 있었다.



「내게는 특별한 사람이 둘이나 되는군. 모든 걸 도와주는 창오빠와, 어떻게든 날 살려서 이 정도까지라도 오게 만든 김성진」



「성진은 나와는 조금 다를걸」



「그래, 다르겠지. 그는 이제 날 내치려고 하니까」



「아니, 나와 너의 관계보다 상황이 낫다는 뜻이야」



당연히 의아해지겠지. 태환은 그렇게 선영의 생각을 짐작해보며 다음에 나올 물음도 거의 예상할 수 있었다.



「무슨 소리야? 성진과 나는 지금 관계가 삐걱거리기 그지없는데」



「삐걱거리고 있을 뿐, 아직 공식적으로 한번도 헤어진 적은 없잖아?」



이해할 수 없음에 선영의 메시지는 잠시 동안 올라오지 않았다. 그리고 태환은 그 틈에 재차 자신의 메시지를 입력해갔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나는, 어쩐지 성진은 절대로 너를 버릴 것 같지 않군」



「뭐…?」



「네가 그를 어떻게 생각하든 간에, 다른 어떤 연인들보다도 더 강한 이어짐의 사슬로 너희 둘은 묶여있어」



지금 나에게 비상식을 상식으로 전환시키길 강요하는 건가? 그렇게 여길 것이라 짐작하며 태환은 왠지 미소마저도 짓고 싶어지는 자신을 느꼈다. 재미있군. 그녀를 이렇게 당황시킬 수 있다는 게.



약간 거들어볼까.



「이런 경우엔 당연히 이유를 요구하겠지?」



「요구하겠어」



「내가 친절한가?」



「창오빠는 친절해. 그러니까 이유나 내놔」



결국 태환은 폭소했다. 물론 그 이유란 것이 좋은 현상인지 나쁜 현상인지는 여전히 알 수 없기에 유쾌한 기분도 잠시이긴 했지만.



「성진은 본래의 너를 살리고 싶었다. 그리고 사랑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는 돌아오지 않았다. 문제는 단순히 돌아오지 않았을 뿐, 본래의 그녀는 여전히 네 속에 잠식해있다. 여기까지가 네가 나한테 해주었던 얘기를 종합해본 것이지. 그렇다면 생각해봐. 사랑하고 싶은 사람이 네 안에 들어있는데 어떻게 너를 버리겠어? 본래의 그녀가 나오지 않으면 않을수록 성진은 더더욱 널 버리지 못할걸? 시작할 기회라도 달라며 속으로 수없이 되뇌이면서. 이보다 더 아이러니한 인연의 끈이 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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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날씨에는 상대적으로 실내가 우중충해보이기 마련이다. 하지만 각종 불빛이 난무하고 가지각색의 사운드가 울려퍼지는 대형 공간은 그런 자연의 섭리까지도 잠시 잊게 만든다. 최소한 이 실내에 들어서있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 난 그대를 감싸는 실크♪ 온몸을 부드럽게, 포근하게♬ 추위로부터 보호해주는 옷처럼, 동시에 가장 가까이 있는 옷처럼♬ -



경쾌한 음악과 함께 거대한 디지털 기기가 형형색색의 불빛을 쏟아내었다. 전방에는 큰 화면이 서있는 사람의 눈높이에 맞추어 고정되어있었고, 그 화면엔 수많은 화살표들이 어지럽게 상단으로 줄지어 올라갔다. 커다란 바닥 판 위에 4개의 전후좌우를 가리키는 화살표 센서판은 내리밟는 여자의 발에 의해 빛을 쏘아올리듯 반짝였다. 그 빛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다른 화살표로 빠르게 이동하는 그녀의 다리. 그리고 쏘아올려졌던 빛이 여자의 발과 헤어짐을 슬퍼하거나 고찰해볼 사이도 없이 꺼지기가 무섭게 다시 그쪽 화살표를 밟는다.



간혹 꽤 오랫동안 재회가 지연되는 경우도 있었으나 그것은 빛이라는 관점에서 한정되어있을 뿐, 보통 사람의 시각에서는 그야말로 찰나에 불과하다. 여자는 운동화를 신은 두 발로 4개의 판을 쉴새 없이 이동하며 밟아대었다. 그리고 화면에 올라가는 화살표들은 어쩐지 여자가 그곳을 밟아 없애는 것처럼 소멸하고 있었다.



- I want to feel your heart♬ I want to feel your heart♬ -



차앙-! 차앙-! 차앙-!



기기의 조명이 번쩍임과 동시에 끝마무리까지 완벽히 해낸 혜진은 환하게 웃으며 손으로 브이자를 그려서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녀와 ‘댄스댄스 레볼루션’이란 기기 주변에 모여있던 구경꾼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최고 난이도인 익스퍼트 모드까지 대부분의 화살표를 모두 없애버린 혜진. 그녀의 엄청난 순발력은 주변인들에게 충분히 구경과 선망의 대상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혜진은 이윽고 송글송글 맺힌 이마의 땀을 훔치면서 옆을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약간 아래쪽.



바로 옆에 똑같이 붙어있는 2플레이어 전용 기기에는 한 남자가 망연자실한 얼굴로 손잡이에 기대 앉아있었다. 물론 그가 올라섰던 기기는 발로 밟는 용도가 아닌 엉덩이를 대고 주저앉는 용도로 전락한지 오래이다. 혜진과 초반에 2인용 배틀모드를 진행했던 성진은 그야말로 완벽히 패한 채 - 처음부터 그 광경을 보았던 주변인들은 말 그대로 그녀가 그를 ‘발랐다’라고 수군대고 있었다 - 굳은 얼굴로 그녀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정체가 뭐냐, 강혜진?”



“오빠 여자친구.”



성진은 이젠 웃지도 않고 그녀가 내민 손을 잡으며 비틀비틀 일어서곤 신음처럼 말했다.



“나도 한때 이거 이목을 끌만한 실력은 있었다고. 그런데 너는 무슨 전문가 수준을 뛰어넘어 그… 뭐? 오타? 오타쿠 수준인데.”



“아, 오빠도 참. 단어 하나 배워주니까 아무데나 써먹네. 별로 적합한 지칭은 아냐.”



그리고 여전히 선망의 눈길을 보내는 주변인들 사이를 빠져나오면서 혜진은 기지개라도 펴는 것처럼 팔을 쭉 펴곤 명랑하게 말했다.



“야아, 그나저나 이런 데에 DDR이 있었다니 정말 반가웠어. 얼마 만에 이렇게 뛰어보는 건지 모르겠네.”



“이젠 고전 게임 다 됐지 뭐. 너도 예전에 이 게임에 얼마나 돈을 투자했을지 짐작이 안 간다.”



“에이, 그 정도 실력을 보면 짐작이 안 가, 오빠? 나 어렸을 때 그 기기 집에 아예 한 대 구비해두고 있었어.”



실내이긴 하지만 주변은 광장처럼 엄청나게 넓었고 사람도 많았다. 각종 오락기기들을 기웃거리거나 만지고 있는 수많은 인파를 가로지르며, 성진은 옆에 같이 걷는 혜진에게 들리게 하기 위해 조금 목소리를 높여야 했다. 혜진은 추억의 게임들이 여전히 광택나는 기기들로 자리하고 있는 게 반갑다는 얼굴로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나저나 강혜진. 여기까지 여행 와놓고 고작 다니는 게 이런 오락실이냐?”



“뭐 어때, 관광지가 괜히 관광지겠어? 우리 사는 곳에는 이런 곳 눈 씻고 찾아봐도 없을 정도로 다 사라졌는데.”



그리곤 또다시 눈에 익은 게임기를 발견하자 “와, 오빠. 이거, 이거 좀 봐”라며 그쪽으로 뛰어가는 혜진. 성진은 그런 그녀의 발랄한 뒷모습을 바라보며 헛웃음을 짓다가 곧 회심의 미소로 돌변했다. 호오, 이건… ‘블러드 오브 파이터’라는 대전액션 게임이란 말이지.



‘이거라면….’



성진은 아케이드 게임기에 이미 동전을 집어넣고 있는 혜진의 반대편으로 걸어가서 자신도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조금 옆으로 내밀어보이며 씩하고 웃었다.



“야, 강혜진. 이건 좀 긴장해야 할거야. 나도 콘솔 게임기로 간직하고 있던 거거든.”



그의 경고에 혜진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는 알 수 없다. 분명한 건 성진이 다시금 남자의 체면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이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도복 입은 남자 캐릭터가 당연히 성진이고 봉을 든 여자 캐릭터가 혜진이 플레이하고 있는 캐릭터이리라 믿어 의심치 않고 구경했다. 하지만 조금 더 주의깊게 바라보는 사람들에게는 반전의 기분을 만끽할 수밖에 없었다. 혜진은 5판 3승제의 게임을 3연승이란 완벽한 승리로 종결시켜버린 것이다.



성진은 오기가 생겨서 몇 번 더 동전을 집어넣어봤지만 곧 그것도 얼마 가지 않아 시들해져버렸다. 실력의 차이가 나도 너무 컸던 것이다. 성진은 이젠 CPU와 대전하는 혜진의 등 뒤로 돌아가 서서 툭하고 내뱉었다.



“학생이 공부는 안하고 게임만 했구만. 너 도대체 이 대학은 어떻게 들어왔냐?”



“만화랑 애니메이션에 빠져있던 시간에 비하면 일각이지 뭐.”



의연하게 한 술 더 뜨며 스틱만 놀리는 혜진의 모습에 성진은 그만 웃어버렸다.



잠시 후, 성진은 그렇게 패배감에 사로잡혀있거나 한가롭게 웃을 수 있던 시간에 감사해야 했음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성진은 아무리 규모가 큰 오락실이라도 유원지에서나 볼법한 놀이기구는 있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대형 실내의 한 구석에는 그 건물의 위용을 자랑이라도 하듯 떡하니 디스코팡팡이란 거대 원판이 자리하고 있었다. 성진은 불길한 표정으로 혜진을 돌아보았고, 원판을 타고 있는 사람들을 초롱초롱한 눈으로 바라보는 그녀의 모습에 낯빛이 확 바뀌어버렸다.



“저거 타자, 오빠.”



때로는 간단한 권유가 거부할 수 없는 공포로 다가서기도 한다. 성진은 중학교 시절 첫경험으로 디팡을 타보고 중앙으로 수없이 튕겨져나가 비웃음속에서 멀미로 헛구역질을 하고는 다시는 안 타겠다고 몇번이고 다짐했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에는 너무도 의외의 상황에 그것과 재회하자 몸이 굳어버렸다. 잠시 후, 정신을 차려보니 혜진의 손에 이끌리다시피 디팡 의자에 자신이 앉아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비명이 나왔을 때는 이미 늦었다. 디팡은 그렇게 성진의 절규를 감싸면서 가동하기 시작했고, 그의 처절한 음성과 혜진의 즐거운 탄성이 묘한 조화로 어우러졌다. 세상은 그들 사이에서 참으로 아스트랄하게 돌아가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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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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