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을 열고 바깥으로 향할 때 - 5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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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열고 바깥으로 향할 때 - 52
“요새 이상한 사람이 여길 자꾸 드나든다니까요.”
“단골이면 좋잖아?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든다는 거지?”
“으휴… 점장님도 참. 돈이면 다 좋아서. 어쨌거나 저랑 나이가 비슷하거나 좀 삭아보였던 것 같기도 한데, 넷북을 들고 와서 뭔 사이트들 다 띄워놓고 혼자 중얼거린다니까요. 그러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서 저랑 눈이 마주치면 배시시 웃는데, 어휴….”
“하하. 그냥 네가 이뻐서 그런다고 생각해. 그런 거 일일이 신경 쓰면 아르바이트 일 어떻게 하려고 그래?”
“징그러워서 기분 나빠요. 아, 어서오세요!”
칭얼대는 여자 아르바이트생의 하소연(?)을 들어주며 계산대에서 매출 등 중간점검을 하던 남자 점장은, 그녀가 갑자기 밝은 목소리로 인사하자 고개를 들었다. 물론 활기찬 미소로 손님을 반기는 건 아르바이트생의 가장 기본적인 업무상 태도 중 하나이다. 하지만 약간 날카로운 통찰력이 가미된 점장의 입장에선 그녀의 태도가 반드시 업무에만 치중됐다고 보긴 어렵다고 느껴졌다. 그 느낌은 호기심으로 전환돼 그녀의 시선을 따라 입구를 보았고, 곧 아주 단순한 원인에 납득하였다. 꽤 키가 크고 세련된 복장을 한 멋진 남자가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곧 여자 아르바이트생은 미묘한 실망감으로 남자 뒤를 응시하였다. 뒤따라 들어온 또래인 듯한(동시에 자신과도 또래인 듯한) 여자 한 명이 같은 일행이었던 것이다. 남자는 계산대로 걸어오더니 싱긋 웃으며 그 여자를 돌아보면서 친절하게 물어보았다.
“뭐 마실래요?”
“아, 저…….”
“커피 좋아하세요?”
“아뇨, 별로…….”
“그럼 밀크티라도?”
“네, 뭐… 그걸로요.”
남자는 슬림한 청바지 주머니 한쪽에서 지갑을 꺼내 카푸치노와 밀크티를 주문하였고, 어느 새 점장을 밀쳐낸 여자 아르바이트생은 환하게 웃어보이며 카드 결제를 완료하였다. 동시에 그녀는 남자 옆에 서있는 선영을 보고는 샐쭉하게 눈을 흘겼다. 뭐야, 자신감 없이 우물쭈물 뭘 주문할지도 모르는 주제에, 저렇게 멋진 남자 곁에 붙어있고. 얼굴만 좀 반반하면 단가?
남자는 검지와 중지로 능숙하게 카드를 도로 건네 받고는 선영과 함께 2층으로 걸어 올라가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는 잠시 후 다시 내려가서 주문한 커피를 갖고 올라와 선영에게 밀크티를 건넸다. 선영이 쭈뼛거리며 자신의 앞에 놓인 밀크티 맛을 음미하는 동안, 남자는 그제서야 테이블 위에 놓은 직사각형의 검은 책 모양 물체를 살펴보는 동작을 취했다. 카푸치노 빨대를 간간히 입에 물면서 찬찬히 기계를 만져보는 그의 모습에 선영은 호기심이 몰려왔다.
“근데… 그거 뭐에요?”
“이거요? 아, 처음 보시는 물건인가 보네요. 트카우탭이라고 하는 일종의 태블릿PC죠. 노트북보다는 성능이 좀 떨어지지만 비슷한 크기의 화면에, 휴대용으로도 좋고 간편하게 터치스크린 방식으로 웹 검색 등의 작업을 하기 좋아요.”
“헤에…….”
컴퓨터라곤 늘 성진의 데스크탑이나 PC방의 컴퓨터만 보아온 그녀로서는 노트북도 아닌 신제품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척 보기에도 비싼 것일 텐데 자신이 고장 내었다는 자각이 들자 다시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이 되었다. 선영은 두려운 표정으로 흘끗흘끗 남자의 눈치를 살폈고, 남자는 몇 번 태블릿을 가동해보다가 여전히 켜지지 않자 고개를 들어 그녀를 마주보았다. 선영이 흠칫 하고 놀라는 것도 잠시, 남자는 전혀 의외의 말을 꺼냈다.
“그러고 보니 서로 이름도 모르네요. 전 이기식이라고 켄러대 문화컨텐츠 학과 3학년 재학중입니다. 이제 곧 4학년이 되죠.”
“아, 저도… 포림대 디지털 출판 학과 3학년 재학… 아니, 이제 3학년이 돼요.”
선영은 자신도 다음 학기면 4학년이라는 점을 말하려다 ‘같은 학번이네요? 혹시 나이가…’로 이어져서 조기 입학 같은 점을 설명하다보면 복잡해질 듯해 그렇게 얼버무렸다. 하지만 자신을 이기식이라 소개한 남자는 선영의 예상과는 또 다른 얘기를 꺼냈다.
“나이차는 좀 날 겁니다. 제가 재수를 했거든요.”
“아, 그럼 두 살쯤…?”
기식은 대충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커피를 마시다가 태블릿을 만지작거리다가를 반복했다. 연상의 멋진 남자의 매력은 이런 데서 나올까. 선영은 왠지 편안해지는 기분으로 밀크티를 쪽쪽 빨면서 기식의 손동작을 바라보았다. 어디 음악 동아리 같은 데서 기타리스트라도 하나? 눈가를 살짝 가린 연한 베이지색의 긴 머리칼과 캐주얼하면서도 멋진 재킷, 슬림한 외모는 연애 경험 없는 - 물론 잠식한 ‘자신’이 아닌 현재의 - 선영의 마음을 흔들리게 하고 있었다.
아직 내게 이런 감정이 남아있었구나…. 본래의 선영이 연애와 섹스에 대한 기억을 완전히 지워버린 것은 사실이고 여전히 유효하다. 하지만 현재의 그녀 또한 하나의 인격체로 분리되어 나온 것이니 그녀만의 고유한 감정으로 새롭게 싹틀 수 있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물론 보다 강력한 경험, 즉 섹스가 동반되면 본래의 그녀가 튀어나오기에 여전히 할 수 없겠지만.
뭐 그런 부분도 앞으로 살아나가다보면 천천히 해결책을 찾아갈 수 있을지도 모르지…. 선영은 창 밖의 화창한 오후 날씨와 더불어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기로 했다. 그 때 선영을 가만히 바라보던 기식은 팔꿈치를 테이블 위에 대고 두 손을 올려모아 턱을 괴는 시늉을 하며 넌지시 물어보았다.
“그런데 우리 초면 맞죠?”
“예? 네… 저는 처음 뵙는 것… 같은데요.”
잘생긴 남자가 빤히 응시하자 선영은 또다시 얼굴이 붉어짐을 주체하지 못하며 더듬더듬 대답했다. 그 모습이 귀여운 듯 기식은 살포시 웃었다. 그는 의자 등받이에 편히 기대면서 카푸치노를 한 모금 빨아들이곤 입을 열었다.
“어쩐지 낯이 익은 것 같다 생각되서요. 혹시 TV에서 봤었나? 연예인 활동 같은 것 한 적 있으세요?”
“아… 아뇨. 그런 적도, 여유도 없었어요. 무슨…. 아, ‘카잔 전쟁’ 게임 대회 결승전이라면 방영됐으니 거기서 보셨을 수도요.”
“아, 그러고 보니 소문의 그 ‘카잔 전쟁’ 여신을 여기서 뵙는군요. 어쩐지… 만나서 영광입니다.”
기식은 테이블 너머로 손을 뻗어 악수의 제스처를 취해보였고, 선영은 ‘저야말로’라고 말하고 싶은 것을 억누르며 그의 손을 맞잡았다. 더불어 약간 우쭐해지는 자신을 느끼고는 기분이 좋아졌다. 이렇든저렇든 이 멋진 남자에게 자신의 잘난 점을 어필한 셈이 된 것이다. 물론 기식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희미한 미소로 커피를 마시다가 트카우탭이라는 태블릿PC를 만지작거리다가를 반복했다.
그 모습을 보던 선영은 다시금 해야 할 말이 있다는 걸 깨닫고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 저어…….”
“음?”
“아… 아깐 도와주셔서 감사했어요. 그리고 그 PC도 죄송…….”
“아, 제가 도움이 된 것 맞나요? 어쩐지 선영 씨를 뒤따라온 무리들이 별로 호의적일 것 같진 않아서요. 뭐 이 태블릿 문제도 있었지만… 어쨌거나 다행입니다.”
“어… 어떻게 변상을 해야 하죠? 아… AS를 받아보아야 견적이 나오려나요? 얼마인진 모르겠지만 저도 비용은 충분히 부담할 수 있을 듯하니…….”
기식은 ‘음…’하고 짐짓 생각하는 표정을 지으며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따금씩 커피를 빨아들이는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던 선영은 조마조마함이 점차적으로 그의 매력에 빨려들어갈 것 같은 기분으로 전환되는 것을 느끼고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어쩌지… 이게 운명적 만남이란 건가? 이래서 사람들이 연애나 관련 내용을 담은 드라마에 빠져드는 건가. 선영은 그런 자신의 기분에 생소해하면서도 설렘을 느꼈다.
이윽고 다시 고개를 바로 해서 선영을 바라보는 기식. 그는 싱긋 웃으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처럼 가볍게 말했다. 그리고 그건 선영이 또다시 예상치 못한 발언이기도 했다.
“그냥 가셔도 됩니다.”
“예?”
기식은 태블릿의 한 귀퉁이를 만지작거리더니 별 거 아니라는 투로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어디가 완전히 부서진 것도 아니고 충격에 의해 내부적으로 약간의 접촉 불량이 생긴 것 같습니다. 이건 AS를 받아도 그다지 많은 비용이 나오진 않을 거에요. 무상 AS기간도 채 지나지 않았으니 어쩌면 아예 비용이 없을 지도요. 설령 비용이 좀 나온들 어떻습니까?”
기식은 선영을 다시 웃는 얼굴로 마주보았다.
“선영 씨 같은 유명하고 아름다운 분을 돕게 된 것만으로도 전 충분히 기쁩니다.”
때때로 멍청한 표정으로 상대방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그 자신도 충분히 느끼고 있음에도 그런 표정을 거두어들이지 못하곤 한다. 그리고 선영은 그런 자신을 탓하지는 않기로 했다. 뒤이어 기식이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을 때도 허둥지둥 말하는 자신 또한 그녀는 탓하지 않았다.
“그… 그럼 혹시 모르니, 연락처라도…….”
“아뇨. 다 필요 없습니다. 인연이 있다면 또 만나겠죠, 뭐.”
그리고 그는 정말로 상관없다는 것처럼 스마트폰의 액정 화면을 손으로 이리저리 매만졌다. 뭘 하는 건가 가만히 바라보던 선영은 그가 이미 태블릿PC에는 관심을 끄고 자신의 다른 일에 빠져들었음을 직감했다. 선영은 빈 밀크티의 컵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채 정말로 그냥 일어서도 되는지를 한참을 고민했다. 동시에 자신이 조금이라도 더 눈앞의 이 잘생긴 남자를 바라보길 원하고 있음을 깨닫고는 그런 자신에게 당혹스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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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조금씩 지면서 낮동안에 채워진 열기가 절정을 달리고 있었다. 때는 겨울이었기에 그 열기는 따스함이란 완화된 단어로 사람들 느낌 속에 각인된다. 그리고 그런 따스함을 이기지 못하고 꾸벅꾸벅 조는 한 남자가 있었다. 꽤 고급스러워보이는 우윳빛 중형 승용차 안에서 어울리지 않을 법한 꾀죄죄한 옷을 입고 있는 형준은, 역시 그와는 어울리지 않을 고급 노트북을 끌어안은 채 고개를 주억거렸다.
덜컥, 탁-.
자세는 불편하지만 내면적으로는 그래도 달콤한 졸음 속을 방황하던 그는 문 여는 소리와 흔들 하는 느낌에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곤 조수석에 앉아있는 자신을 한심한 듯 슬쩍 바라보는 시선에 서둘러서 입가의 침을 닦았다. 물론 침을 다 닦기도 전에 이미 기식은 차키를 꽂고 시동을 걸고 있었다.
“이… 이제 끝난 거야, 기식아?”
“어.”
“어땠어, 그 은선영이란 년의 기억은?”
“꽤 많은 부분을 잃어버린 것 같더군. 게다가 완전히 숙맥이 다 되었던데. 마치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말야. 후후… 이거, 일이 재미있게 될 것 같아.”
그의 키득거리는 음성에 형준도 덩달아 즐거워졌다. 일이 그의 뜻대로 잘 풀린다면 자신에게 주어지는 보상금도 확실해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분위기가 좋아진 틈을 타 형준은 좀 더 자신의 궁금증을 풀어보기로 했다. 그것은 역시나 선영과 기식의 만남에 관한 것이었고, 보다 자세한 정보를 기대하는 형준에게 기식은 운전에 집중하면서도 모두 얘기해주었다. 하지만 그 내용은 형준을 꽤나 당황하게 만들었다. 황당무계한 정보 때문이 아니라 정보 자체가 없다는 데에서 나온 황당함이었던 것이다.
“아니, 하다못해 연락처라도 알고 왔으면 일이 훨씬 수월해졌을 것 아냐?”
기식은 신호등에 걸린 틈을 타 형준을 곁눈으로 슬쩍 보고는 한숨을 폭하고 쉬고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네가 그래서 안 되는 거야.”
뭐가 안 되냐고 반박하려던 형준은 순간적으로 나오는 말을 꾹 삼키곤 그의 옆모습만 살펴보았다. 그를 자극해서 좋을 것도 없거니와 여자 꼬시는 데 선수를 넘어서 픽업아티스트라 불러도 무방할 그의 행동패턴은 반박할 거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녀석은 기억상실증에 걸린 지 1년도 안 됐다. 네가 찾은 같잖은 정보로라도 추측해보자면 길어야 반 년이군. 그렇게 많은 기억을 잃어버린 채 기자들과 광적인 추종자들로부터 시달리다 보면 사람에 대한 방어기제가 예민해질 수밖에 없지. 아무리 호의적으로 접근했다 해도 곧바로 상대의 개인정보를 요구해선 안 되는 일. 반면에 녀석의 빈약한 세상살이 경험을 노려서 우연을 가장한 필연을 만들어낸다. 꼭 기억상실증 영향이 아니더라도 아직 20대 초반인 여성은 연애에 관한 환상과 신비에 젖어있게 마련이지. 그걸 이용하면 더 수월하게 접근할 수 있을 거야.”
그리곤 여전히 실망스런 기색을 비치는 형준에게 명령하듯 말했다.
“그래서 네가 필요한 것 아니겠냐? 쓸데없는 생각 말고 다음에 열릴 ‘카잔 전쟁’ 대회나 검색해봐. 은선영의 연락처도 재량껏 찾아보고. 명실상부 장인의 공학도 해커가 옆에 있는데 내가 뭐하러 리스크를 안아야 해?”
형준은 ‘장인의 공학도’란 말에 슬그머니 자부심이 섞인 미소를 지으며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기식은 그런 형준을 비웃으며 신호등에 초록불이 들어오자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자신의 노트북을 어루만지던 형준은 문득 또 다른 게 궁금해진 듯 기식을 슬쩍 바라보며 조심스레 질문했다.
“그… 그런데 굳이 다른 녀석들까지 필요할까? 아지트로 불러들인 녀석… 들 말이야. 그냥 잘 거라면 꼬셔서 아무 모텔이라도 들어가면 그만 아냐?”
“내가 왜 이런 자금을 들여가며 계획을 짜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군. 기억상실증까지 걸린 녀석을 그냥 따먹어봤자 뭔 재미냐? 그럴 바에야 그냥 나이트에서 널리고 널린 년들 하나 골라먹음 그만이지.”
그리고 형준은 보았다. 기식의 앞머리칼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하지만 가늘고 날카로운 눈 안에 빛나는 욕망의 눈동자를.
“과거의 추억 속 썸씽이 있었던 년은 그에 맞는 대우를 해주는 게 인지상정이지. 그 때 내가 얼마나 어이가 없었는지… 수 년이 지난 지금도 기분이 더러워지는군. 그래서 기억을 잃기 전의 자신을 원망하며 철저히 짓밟히는 꼴을 봐야 해. 바로 모든 스테이지가 마련된 강간의 향연 속에서.”
“가… 강간?”
“녀석 페이스 이쁘지? 사진으로 볼 때보다 더 이쁘다, 실제로 보면. 그런 년을 밑바닥까지 유린시키는 데서 나오는 짜릿함은 너에게 있어서도 어느 야동과 견줄 수 없는 진귀한 구경거리가 될 텐데.”
강간이란 대범한 계획을 지니고 있는 기식의 말에 격앙한 형준은 그의 이어지는 말에 다른 의미로 놀란 표정이 되었다. 확실히 이건 꿩 먹고 알 먹기일지도 모른다. 주변 패거리들은 물론 자신에게도 공개되는 철저한 강간의 현장. 형준은 노트북을 열고 선영의 사진을 불러온 후 침을 꼴깍 삼켰다. 그런 형준을 키득거리며 다시금 비웃어준 기식은 액셀에 얹힌 발에 더욱 힘을 주었다. 하얗고 반짝거리는 그의 중형 승용차는 아지트를 향해 거침없이 질주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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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델의 이름을 떠나서 어느 국적인지도 불분명한, 발음하기 어려운 외국어로 잔뜩 치장된 인물의 잡지가 십수 개쯤 거실 여기저기에 나동그라져있다. 어떤 것은 덮여 있고 어떤 것은 펼쳐져 있는, 그리고 또 어떤 것은 찢겨져 있는. 커다란 카펫 위에 그러한 잡지들 중 몇 개를 배에 깔고 엎드려서 곁에 있는 건어물 조각을 질겅거리며 잡지를 뒤적거리는 레게 머리의 남자가 있었다. 그의 옆에는 흑인이 아닌가 싶을 만큼 까무잡잡한 피부의 남자가 엎드려 있는 그의 등 위에 발을 걸친 채로 소파에 기대어있다. 그 역시 잡지를 뒤적거리며 시간을 보낸다. 또 어떤 간사하게 생긴 이는 소파 팔걸이에 걸터앉은 채로 스마트폰을 갖고 놀기에 여념이 없다.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는 커다란 대형TV앞에서 콘솔 게임기를 앞에 두고 두 명이 조이스틱을 열심히 놀리면서 대전 액션 게임에 심취해있다. 그 옆에도 한 남자가 감자칩을 와작거리며 게임 화면을 응시하면서 시간을 때우는 모습이다. 여섯 명의 남자들 모두 하나같이 인상이 험악하거나 혹은 살가움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을 페이스를 하고 있었다.
그런 그들과 어울리고 다닌다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말끔하고 잘생긴 기식은, 이미 그들과 그런 풍경에 익숙해진 것마냥 아무렇지도 않게 아지트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파트 한 동을 전세 내고 방탕한 짓거리를 일삼는 그와 패거리들은 이미 서로에게 낯이 익은 듯 보고도 별 인사를 건네지 않는다. 하지만 기식이 그들의 행동대장쯤으로 짐작될만한 것은 몇 가지 있었는데, 그 중 하나는 그의 옷차림이었다. 슬림 청바지와 티셔츠, 재킷, 목걸이, 운동화 등이 모두 명품으로 치장돼있었다. 더군다나 험악한 무리들의 가운데에서도 전혀 위축되지 않는 모습은 그가 일부러 그들을 불러모았음을 짐작케 하는 모습이다. 물론 뒤따라가는 형준은 몇 번 와봤어도 여전히 익숙해질 수 없다는 듯 잔뜩 움츠리고 있었지만.
“여-. 왔냐, 소혁?”
조이스틱을 열심히 놀리며 게임에 전념하던 무리 중 하나가 여전히 게임화면만 응시하며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기식은 언짢은 투로 그를 노려보며 곧바로 입을 열었다. 맞인사가 아닌 대응에 가까운.
“그 이름으로 부르지 말랬지?”
“뭐 어때, 이 아지트에는 우리밖에 없는데. 방음 시설도 꽤 괜찮게 돼있어서 이정도 목소리는 새어나갈 염려도 없다구.”
“모든 일에는 만전을 기해야지. 내 뒤에 있는 형준 녀석도 둘만 있을 때조차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고.”
조이스틱을 열심히 놀리던 약간 얼굴 긴 사내는 그제서야 기식쪽을 쓱 돌아보곤 조금 고개를 더 돌려 형준까지 보았다. 그리고는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이죽거리는 음성을 내었다.
“글쎄… 내가 보기엔 일에 관한 이유 때문만은 아닌 듯한데.”
“해고되고 싶냐?”
“휘유, 알았어, 알았어. 예민하긴. 그나저나 정보통까지 납시었군. 이번엔 또 무슨 일을 꾸미고 계시길래 이렇게 여러 명을 불러모았지?”
기식은 재킷을 벗어서 어깨에 턱하고 걸치고는 가지런한 흰 이빨이 드러나도록 히죽 웃었다. 그리고는 형준에게 길게 늘려서 얘기했던 오브젝트를 한마디로 압축해서 툭하고 내뱉었다.
“강간.”
“와우!”
여기저기서 관심 어린 시선이 집중되며 환호가 터져나온다. 엎드려있던 레게 머리 남자가 짓궂게 웃으며 기식을 올려다보았다.
“우리도 맛 좀 보게 해줄 거지?”
“조리돌림은 상황 봐서. 어쨌든 너희들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만일을 위한 건지도 몰라. 상대는 생각보다 너무 쉽게 넘어올 것 같거든.”
“대상이 누군데?”
기식은 그 물음에는 대답도 않고 주변을 잠시 둘러보며 다른 질문을 건넸다.
“경희 오늘도 왔냐?”
“천경희 말야? 걔 저쪽 방에 있다. 걔 완전 너한테 필 꽂힌 것 같던데.”
키득거리며 거실 한쪽 방을 가리키는 사내를 뒤로 한 채 기식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그쪽으로 걸어갔다. 문득 그는 어찌할 줄 모르고 서있는 형준을 돌아보곤 다른 쪽의 쪽방문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넌 저 방에 들어가서 노트북 충전시키며 아까 말한 선영의 정보를 좀 더 찾아봐. 그리고 그 년 곁에 있다고 하던 임시보호자인가 하는 녀석 조사도 해보고.”
“홍준석인가 하는 녀석은?”
“전에도 말했듯이 별 걸림돌이 될 것 같지는 않군. 내버려둬.”
모든 상황을 신속하고 정확하게 꿰뚫는 그의 수완이 발휘되고 있는 순간이었다. 형준은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이곤 쪽방 쪽으로 몸을 돌렸다. 기식은 날카로운 매의 눈빛을 한 채 선영의 보지 속에 자지를 박아대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다. 그는 짧게 심호흡을 하고는 고개를 숙여 큭큭거리며 웃고는 자신도 앞에 있는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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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이어집니다.
여자 신캐릭터 이름이 나왔죠…. 다음 화에 등장합니다. 하지만 분량상 많이 등장할 일이 없다는 게 함정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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